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07.21.2024)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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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07.21.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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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29회 작성일 Jul 2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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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7월 21일
본문: 요한계시록 1: 9-20
제목: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플라톤이라는 희랍 철학자가 쓴 ‘공화국’이라는 책에서 동굴 이야기가 나옵니다. 깊숙한 동굴 속에 손발과 몸이 묶인 채 모닥불이 비쳐주는 그림자만 쳐다보고 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이 겨우 포박을 풀고, 동굴 밖으로 나와 비로소 태양이 비치는 세상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다시 동굴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너희는 지금 태양이 아닌 그림자만 보고 있는 거야!”라고 설득해도,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어둠 속에 익숙하다 보니 그림자를 실체로 간주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일단 고정관념이 생기면 좀처럼 거기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좋은 것이 오는 것을 볼 수 없고, 또 기대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신의 신앙체험이나 지식을 마치 전부로 알고, 자기 생각을 고집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입니다. 고정관념이 무서운 것입니다. 지극히 사소한 생각일지라도 그것이 일단 사람의 마음 속에 한 번 달라붙으면 좀처럼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교주를 추종하거나, 교리를 배우거나, 신앙규칙과 규율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 그분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분의 존재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분과의 신령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칫 피상적이고 소극적인 선에서 그칠 위험이 있습니다. 성경을 배우고, 기도하고, 거짓말하지 않고, 법을 지키는 정도에서 자신이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임을 가리켜 줍니다. 소극적으로 규율과 규칙을 지키는 정도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세계는 너무도 얕고 빈약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겨우 교회 나오는 정도에서 다 된 것처럼 소극적이고, 심지어 아주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안밖으로 크게 도전 받고 있습니다. 전쟁과 테러, 핍박과 압제 등 외부로부터 공격이 교회를 위협합니다. 세속주의와 물질주의, 그리고 향략주의가 물밀듯이 교회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교회는 무력하여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생명력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영적 후퇴로 말미암아 자신감마저 상실하고 달팽이처럼 굴 속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점점 더 형식적이고 기계적이 되어서 생기 없는 화석처럼 되었습니다. 교회는 더욱 더 세상의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왜 교회가 영적침체의 늪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가는 것일까요? 이렇게 병든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어디서 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 신앙의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과연 무슨 힘과 능력이 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생각만 하면 내 마음 속에 기쁨과 평강으로 충일하여 살 맛이 납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현재 처한 고난을 이길 능력이 되고 있습니까? 그분의 영광에 압도 되어 감격과 감사가 있습니까? 그래서 세상이 주는 재미 보다도 그분과의 친밀한 교재 가운데 누리는 신령한 복락이 더 달콤하고 더 즐겁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예배 가운데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십니까? 예배시간이 기다려지고 그분에 대한 기대감으로 마음이 설렙니까?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끓어올라서 교회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소개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는데 예수님은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분, 즉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적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존재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 ‘영광’이라는 단어 외에 그분을 적절하게 표현할 만한 용어가 없습니다. 우리가 영광을 생각할 때 우선 찬란한 광채를 생각하게 됩니다. 광채는 영광에서 나오는 찬란한 빛을 말하지요. 예수 그리스도안에 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체를 우리는 볼 수 없어요. 죄인인 우리 눈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의 형상을 볼 수 없어요. 오직 하나님이 보여 주실 때만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요. 이것이 계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영광을 볼 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에 눈을 뜨게 해 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불러 일으키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새롭게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 원합니다.

1. 그리스도의 영광

사도 요한은 예수를 증거하는 일로 밧모섬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어느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뒤에서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습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을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은 일곱 교회를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소리였습니다. 지금 그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바라보며 낙심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소리치십니다.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라. 영광과 능력과 권세가 충만한 내 모습을 보라.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더 경이롭고 놀라운 세계가 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자신을 바라보며 패배주의에 빠져 있습니까? 세상을 바라보며 절망하십니까? 처한 상황을 보며 두려움과 염려로 가득합니까? 그렇다면 눈을 들어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요한도 그 음성을 듣고서 몸을 돌이켜 보았을 때 놀랍게도 영광 가운데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요한이 영광 가운데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은 13절에서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었다고 했습니다. 발에 끌리는 옷은 아무나 입는 옷이 아닙니다. 대제사장이나 왕이 입는 옷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요일 2:1)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늘 죄의식으로 자책하며 사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입니다. 가슴에 금띠를 띠는 것은 왕의 위엄과 신성의 권위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생각과 삶 모두를 주관하시며 통치하십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각 신체를 묘사하는데 14절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순결성과 성결함, 그리고 신성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가 하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어린양이 되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환상 중에 뵌 예수님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존귀하신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눈은 불꽃 같고” 불꽃 같은 눈은 예수님의 통찰력과 예지를 가리킵니다. 뭇사람들의 마음속까지 감찰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은밀한 죄라 할지라도 그것까지 다 들여다 보십니다. 또한 불꽃 같은 눈은 죄에 대한 격렬한 진노를 뜻하기도 합니다. 죄를 그냥 간과하시지 않고 심판하시는 눈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형편을 아주 세세하게 잘 알고 계시기에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며 도우시고, 정확하게 인도하여 주십니다.

15절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이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심판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계시록에서 예수님은 땅과 바다위에 발을 놓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땅과 바다와 모든 것을 발 아래 밟고 계시는 통치자이십니다. 그런데 그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왕 중의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이 반역하고 거역한 자들을 철저히 심판하실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성은 마치 밧모섬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처럼 컸습니다. 한 번 말씀하시면 아무도 핑계하거나 변명할 수 없는 권세 있는 말씀입니다.

16절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다고 했는데 오른손은 존귀와 능력을 뜻하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를 대표하는 주의 종들을 뜻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주의 종들을 직접 통솔하여 교회를 붙잡고 계시는 것을 보여 줍니다. 교회가 연약해 보여도 강한 이유는 주님이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당시 로마 군인이 사용하는 짧고 곧은 칼(machaira)이 있었습니다. 60cm 정도 길이의 단검인데 칼날이 양쪽에 있습니다. 그래서 좌우에 날선 검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검인지 모릅니다. 로마는 이것을 가지고 세계를 정복했는데 바로 그 검에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했습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리합니다. 그리고 역사가 나타납니다. “빛이 있으라”하실 때 빛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능력의 말씀이 주님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탁월하심과 그 분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얼굴 빛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광휘로운 빛이 얼마나 강렬하던지 태양이 빛을 잃을 정도입니다. (계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그래서 사도 요한도 17절에서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사람은 마치 나무토막 처럼 쓰러집니다. 한 때는 제자 중에서도 가장 많이 사랑 받고, 주님의 품에 안기웠던 제자가 요한입니다. 그는 이전에 3년 동안 예수님을 좇아다니며 두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고, 두 귀로 들었고, 두 손으로 만져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만나고 있는 주님은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만나자 영광의 주님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광의 빛이 비추자 썩은 새끼줄이 흘러내리듯이 온 몸에서 힘이 빠지고 그대로 쓰러진 것입니다.

요한만 이런 경험을 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로 변화되기 이전 사람 사울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그 영광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행 22:6)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행 22:11)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태양빛 보다 훨씬 더 강력한 빛, 주님의 영광의 빛이었습니다. 그 빛의 광채로 볼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어설프게 신앙생활하는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존귀한 분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렇게 대해도 괜찮은 줄로 생각해요. 예배에 대한 기대감도 없고, 기계적으로 몸만 나오는 것입니다. 진정성이 빠진 형식적인 예배를 드립니다. ‘주여! 주여!’하고 부르지만 실상은 주님을 높이며 엎드리지 않습니다. 특히 자신의 이해관계에 걸린 문제가 발생하면 주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정하고 선택합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그게 아니었어요.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자신의 전부를 걸었습니다. 심지어 목숨까지 걸었어요. 그럴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성경은 그렇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 전부를 투자하고 바쳐도 조금도 아깝지 않을 만큼 영광스럽고 부요하고 소중한 분이시라고 말씀합니다.

2. 그리스도의 권세

17절 주님의 영광에 압도 되어 쓰러져 있는 사도 요한에게 주님은 오른손을 얹고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사도 요한이 환상 속에서 본 주님의 영광 앞에 압도 되어 죽은 자같이 엎드러져 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현재 요한 자신을 포함한 교회가 처한 전체적인 상황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을 삼키려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핍박의 불길을 보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유배 중입니다. 그가 책임지고 있는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로마 제국 도미티안 황제는 ‘Dominus et Deus Noster'(우리 주와 하나님)이라는 호칭으로 자기를 부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살아 있는 신으로 숭배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충성된 크리스천이라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형언하기 어려운, 무서운 핍박과 박해가 가해졌습니다. 순교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누가 목숨을 잃게 될 것인가?

요한이 이런 상황에 마음 쓰고 있을 때 우리 주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교회에게 환난과 고난이 있고, 투옥과 핍박이 있을 것이지만,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촉구하십니다.

물론 핍박을 당하고 순교의 위험에 직면한 교회에게 주님이 단순히 “두려워 말라”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두 가지 근거를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영원하시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이것은 이미 8절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하나님의 주장과 똑같습니다. 알파는 헬라어 알파벳 첫 글자이고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입니다. 알파벳에서 알파 이전이란 없고, 오메가 이후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 ‘이전’도, 하나님 ‘이후’도 없습니다.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또 아무리 미래를 달려봐도 항상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계십니다. 처음부터 언제나 존재하는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처음이요 나중이라는 사실은 동시에 주님의 절대 주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로마 황제가 크리스챤의 생명을 쥐락펴락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 지도자들 손에 의해서 세상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을 받거나, 경제에 타격을 받거나, 남편이 병들고, 아내에게 어려움이 생기고, 자식들에게 문제가 발생해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산 자라”고 자신을 부르십니다. 이것은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 그리고 나사로처럼 죽었다가 다시 소생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이들은 살아났지만 그후 제 명대로 살다가 다시 죽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산 자” Living One 이란 한 번 죽었다가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셔서 다시는 죽지 않고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그분은 죽음을 이기셨고, 다시는 죽지 않으실 것입니다. 부활의 승리로 인해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죽음이 가공할 만한 공포로 사람들을 호령해 왔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벌벌 떨며 죽음의 종노릇을 해 왔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순교의 위협을 받아도 두려워하지 않을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 권세자들보다, 죽음의 권세 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권세자들은 우리에게 육체의 죽음을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영과 육을 함께 멸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할 분을 두려워하면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세상은 불에 타 없어지며 멸망하겠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사람들은 엄위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짐을 받고 영원히 삽니다. 두려움을 이길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도 초대교회 성도들 만큼은 아니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걱정근심이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염려와 걱정과 근심되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상은 갈수록 거대한 공룡처럼 우리를 압도하며 두렵게 다가오고, 우리는 그 세상 앞에서 너무나 힘없고 무력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중에서 우리가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자 할 때 불안과 두려움으로 위축 되어 뒷걸음 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문제를 잘도 풀어가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되는 것이 없고, 왜 인생이 꼬이고 힘들기만 하는 것일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탄식하며 “주여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주님은 지금 뭘 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능력의 손길을 얹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 우리 주님은 생사화복의 열쇠를 쥐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주님을 붙들고 있으면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하늘의 복을 받게 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얼마나 자각하고 있습니까? 처음 믿을 때 보다 지금이 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여 이 세상을 분토처럼 여기는 수준에 이르렀습니까? 주님을 얼마나 생생히 경험하며 알아가고 있습니까? 사도 요한이 보았던 그 영광의 주님으로 인식하십니까?

오늘날 믿는 신자들이 크게 각성해야 할 점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 빈곤하다는 것일 것입니다. 영광의 주님을 알지 못하니까 그분에 대한 기대감 또한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시하게 하는 사람일 수록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그리스도를 아주 시시하게 여긴다는 점입니다. 예배도 거룩한 기대감 없이 마지못해 드리고, 신앙생활도 그저 그렇게 형식적으로 무늬만 갖춥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영광의 주님을 위해서 조금의 수고와 눈물과 땀을 흘리기로서니 그걸 과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우리의 기도와 헌신이 헛된 것입니까? 그분이 그럴만한 가치조차 없는 분이십니까?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누구십니까? (골 1:15-17)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지금 이런 저런 문제로 몹씨 힘들고 고통스러워 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장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눈을 들어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 알파요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 빛난 주석 같은 발로 온 세계를 지배하고 계시는 그리스도,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이 해처럼 힘있개 빛나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이 자신의 오른손을 뻗치고 “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 같이 이 영광의 주님을 더욱 알기를 갈망하고, 그분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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