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07.14.2024)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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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07.14.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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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499회 작성일 Jul 1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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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7월 14일
본문: 요한계시록 1:1-8
제목: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오늘날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많은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워졌고, 편리해졌습니다.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데 매일 톱뉴스를 보면 인간성 파괴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만큼 물질적이 된 것입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고,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는 사상적으로, 신앙적으로 그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 존경을 받았지만, 지금은 돈 많은 사람이 최고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규범이나 삶의 원칙이 자꾸만 무너져 갑니다. 그대신 자신의 개성과 주장이 너무나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자기 스타일에 맞게, 자기 기호에 맞게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말씀에 대한 절대성은 갈수록 약화되고 있습니다. 주일예배도 드릴 상황이 되면 드리는 것이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전혀 이에 대해 의식을 갖지 못합니다. 아무 때나 어디서나 인터넷으로 예배드리면 되지 뭐. 자유롭게 생각합니다. 헌금도 물질에 여유가 있으면 하는 것이고, 안 되면 못하는 것이고, 편하게 생각합니다. 분명히 회개할 죄의 문제가 있는데도 이렇게 저렇게 변명하고, 합리화하고 지나갑니다.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사는 데 뭐, 난 그들에게 비하면 양반이지, 하고 넘어갑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단지 축복의 수단이요, 풍요로운 삶의 악세사리 정도로 전락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점점 신앙의 순수성과 영성은 잃어가고 세상 사람들과 신자들 사이에 구분이 없어져 갑니다.
 
오늘날 급변하는 시대을 생각하면 마치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 질서의 레일을 이탈하여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달려가는 고속열차와도 같이 느껴집니다. 무작정 무서운 속도로 줄달음치는데 그 끝을 아무도 모릅니다. 옆에 사람들이 달려가니까 우리도 마냥 덩달아서 달립니다. 그런데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자신의 현 위치가 어디인지 전혀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무조건 남보다 빨리 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편한 길로 뛰는 것이 꼭 좋은 것이 아닙니다. 좀 힘들고 불편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고 고생이 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진리의 길을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의 법도를 따라 달려가야 합니다. 내 영광과 내 욕심과 내 뜻대로 달려갈 것이 아니라 왕 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이 예비하신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며 믿음의 길을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기 원합니다. 창세기가 우주, 세상, 국가와 나라, 사회와 개인, 인생과 신앙의 기원에 대해서 보여 준다면 요한계시록은 역사의 종말에 관해서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AD 90-95년경 도미티안(Domitian)황제 때에 사도 요한이 기록한 묵시록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11사도 중에 오직 유일하게 생존하였던 요한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90살이 넘는 나이에 붙잡혀 밧모섬에 유배 되었습니다. 당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아주 심한 때였습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박해한 왕으로 네로만 떠올리지만 도미티안도 이에 버금가는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신격화시키고 황제숭배를 강요하였습니다. 그래서 2장 13장을 보면 버가모교회의 안디바는 황제숭배를 거부하다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감옥에 갇혔고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하루 종일 돌을 깨거나 무거운 돌을 나르는 노역을 강요당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90이 넘는 노인이 자기 몸을 가누기도 힘들 텐데, 뙤약볕 밑에서 하루 종일 돌을 깨고 나르는 강제노역을 할 때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요한만 힘든 것이 아니라 이를 옆에서 바라보는 신자들도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왜 우리 신자들이 이처럼 힘든 박해를 당해야 하는가? 도대체 주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다시 오마 말씀하신 예수님은 왜 아직도 안 오시는가? 회의적인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가운데 우리 주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계시를 보여 주셨습니다. 환상 가운데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어디에 계시는가?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생생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세상에서 많은 고난과 시련 가운데 있는 주의 백성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 길선주 목사님은 계시록을 100독하시고 부흥집회 때마다 계시록으로 설교하셨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이 큰 위로를 얻고 소망을 품고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절하자 일제는 계시록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요한계시록을 예수님의 재림의 날짜를 가르쳐 주는 신비의 책으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나오는 숫자를 열심히 계산합니다. 또 마지막 날 도대체 몇 명이나 구원 받는가? 거기에 관심을 갖습니다. 주로 이단들이 이렇게 재림의 날짜와 구원 받을 신자의 숫자를 가지고 성도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여 자기를 추종하게 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 다른 극단은 계시록을 읽고서 현실을 부정하거나 도피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맡겨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고 예수님 재림하기만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요한계시록 책을 잘못 접근한 결과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런 책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우주와 세상 권세를 쥐고 계시는 분이 누구인가? 우리 주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공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상에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아직 악이 존재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사단의 세력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승리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공부를 통해서 우리는 영광 중에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도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입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한 승리와 장차 재림의 때에 이루어질 영광을 소망하고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1. 계시란?
 
기독교가 세상의 모든 종교와 학문으로 부터 구별되는 점이 무엇일까요? 세상의 모든 종교와 학문은 인간 이성을 기반으로 한 ‘논리’에 근거합니다. 이성적 사고와 논리의 전개에 의해서 학문이 성립 되고, 종교도 자신의 신념이나 깨달음, 그리고 체험을 바탕으로 세워집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계시’에 근거한다고 말합니다. ‘계시(revelation)’라는 말은 헬라어 ἀποκάλυψις 에서 유래하였는데 “드러나다, 나타나다”의 의미이며, (구약) 히브리어로는 “덮개를 벗어 버리는 것”,  (신약) 헬라어로는 “감추인것을 보이게 하다”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란 하나님께서 인간이 감히 추론하거나 감지할 수 없는 하나님 자신과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나타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능동성과 주도권이 언제나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시가 인간 이성과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권위에 기초하기에 참된 신앙은 언제나 순종을 요구합니다.
 
기독교가 계시에 근거하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초월적인 계시가 유한한 존재 인간에게 전달되고, 또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이성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이성과 논리를 사용하되 어디까니나 계시에 의존하여야 합니다. 이성은 계시를 인식하는 도구일 뿐이지, 계시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장 1절에서 이 편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사도 요한은 자신이 쓴 계시록이 자신의 묵상이나 체험한 환상, 상상이나 창작 등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꿈을 잘 꾸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꿈들은 아주 생생하게 잊어지지 않기도 하고, 어떤 꿈은 해석을 해 보면 의미가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꿈은 평소에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꿈으로 나타납니다. 말 그대로 자기 꿈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의 계시’라고 말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주신 계시이며, 앞으로 이루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본 것을 증거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의지나 잠재의식과는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고 합니다. 2절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당시에 구약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예언 성취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전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계시를 주시는 당사자가 되시고, 동시에 계시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계시의 핵심 내용입니다. 계시록 전체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서두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계시의 원천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1절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습니다. 계시의 내용과 그 계시의 모든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후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보좌 우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권세와 능력을 아들 그리스도께 위임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계시의 권한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2. 계시자,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 가장 막강한 사람들은 땅의 임금들인 로마 황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온 세계를 손 안에 넣고 좌지우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권력과 권세들이 그들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들의 말 한마디면 없던 건축물도 세워지고, 있던 건축물도 하루아침에 없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사 문제가 황제 한 사람의 손가락에 의해서 좌우되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은 실제로 신으로 추앙 받았습니다. 특히 도미티안 황제는 자신의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자신을 “주와 신”(Dominus et Deus)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런데 5절 말씀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까?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나신 부활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막강한 권세를 가졌던 로마 황제도 죽음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 저 유명한 시저도 부르투스에게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배신자의 칼에 “아! 부르투스, 너마저”외치며 죽었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로마의 권력자이지만 자신의 죽음 앞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겉으로 볼 때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큰 칼에 둘러싸인 호위를 받았지만 죄와 죽음 앞에서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죽음을 이기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세상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이 땅의 모든 임금들의 머리가 되십니다.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그분이 역사의 종말에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7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볼찌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에 사람들은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이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악의 승리로 종결되지 않도록 우리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여기서 구름은 큰 영광과 권세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처음에 오실 때는 아무도 모르게 오셨습니다. 로마제국의 변방, 팔레스타인 땅, 그리고 말 마굿간에 있는 구유에 아기 예수가 누이셨습니다. 그리고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때는 자신의 목숨을 인류의 대속제물로 주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참으로 애처러운 어린양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오십니다. 하늘 구름을 타시고, 영광스럽고 찬란한 모습으로 오십니다. 각 사람이 눈으로 이 예수님을 볼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로마 군병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때리고, 채찍을 내리치던 자들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울부짖고 있는데 그 밑에서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갖고자 제비뽑기를 하던 자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던 자들도 다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게 됩니다. 왜 애곡합니까? 자신들의 죄와 사악함이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날에는 말씀 듣기를 거부하고 자기 나름대로 행하던 자들이 다 땅을 치며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조롱하고 핍박하던 자들, 섬김과 도움의 손길을 받고도 늘 뺀질거리던 자들이 다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3. 계시의 목적
 
그런데 이 계시의 편지를 누구에게 보냈습니까? 1절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종들’이란 그 당시 소아시아(터기)에 위치한 일곱 교회의 사역자들을 말합니다. 4절입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여기서 일곱 교회는 그 때 소아시아에 실제로 존재했던 교회들을 가리키지만 이 일곱 교회는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대표합니다.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존재하게 될 모든 교회를 포함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곤경에 빠져 있는 교회들을 위해서 그의 종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앞으로 구원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펼쳐 보여 주심으로써 이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시기 위해서 이 계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요한계시록 편지가 보내졌던 최초 수신자 초대 교회 공동체는 몹시도 견디기 힘든 혹한기를 지나는 중이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칼날 앞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사람들의 오락거리로 전락해 짐승의 밥으로 던져집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신자들은 투옥되거나 사도 요한처럼 유배되는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배교자들은 속출하고 공동체를 배반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마음에 자리 잡은 정서는 무엇일지 상상해 보십시오. 상실감, 패배감, 두려움, 배신감, 분노, 슬픔, 버림 받은 느낌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처럼 실의에 빠져 주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교회를 향해 요한계시록은 천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한 세력의 상징으로 표현된 용(12:3)과 짐승(13:1)과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을 멸망시킵니다. 거짓 선지자(13:11)와 바벨론(14:8)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와 함께 왕노릇하며(20:4) 세세토록 새하늘과 새땅에서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22:5). 특히 계시록 17장 14절은 본서의 주제가 되는 구절입니다.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오늘 본문 1절에서도 많은 배교자들도 인해서 낙심하며 두려워하고 있는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에 꼭 이루어질 것입니다. 더디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히 이루어집니다. 축구경기는 경기 시간이 끝나도 주심이 바로 휘슬을 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경기가 지체된 만큼 시간을 연장시켜 주는 것입니다. 물론 경기 시간이 이미 지났기에 언제든지 휘슬을 불면 끝나게 되어있습니다. 이처럼 역사의 종말도 이미 초읽기에 들어갔습니다. 언제 휘슬이 울릴지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벧후 3:9-13 )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여기 소수의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 변함없이 예배들 드리기 위해 함께 모입니다. 그들은 예배 드릴 때마다 글을 아는 사람이 일어나 예언의 말씀을 큰소리로 읽습니다다.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며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아가기로 다짐하며 헤어집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자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복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듣는 자들’그리고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깝습니다.
 
결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성도들을 향하여 명령하시기를 믿음을 굳게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과 지키는 것을 계속하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맡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이 생기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실지 세워 놓으신 구원 계획입니다. 아무도 이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구원의 비밀이 완전히 드러나게 되었고, 사도들이 이를 증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계시의 비밀을 사도들의 전통 위에 세워진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 영혼에게 부지런히 말씀을 전파하여 저들 또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밝혀 질 수 있습니까? 첫째로 우리 자신이 직접 성경책을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를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말씀이 전파 되도록 하셨습니다. 물론 이 일은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회중들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축복입니다. 만약 말씀에서 떠나 교회마저 영적으로 죽을 때 이 세상에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악하면 악할수록, 핍박이 심하면 심할수록, 교회는 계시의 말씀에 더욱 부요해야 합니다.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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