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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눈을 들어 주께 향하라 (12.03.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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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12회 작성일 Dec 04 2023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12월 3일
본문: 시편 123: 1-4
제목: 눈을 들어 주께 향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구약성경 느헤미야서를 보면 바벨론의 아닥사스다 왕 때 느헤미야가 수산 궁에서 술 맡은 관원으로 나옵니다. 고대 근동에서 술 관원장의 위치는 아주 높은 직입니다. 왜냐하면 절대 권력을 가진 왕과 가장 가까이 근접해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독살의 위험을 안고 사는 왕으로서는 가장 믿을 만한 신복을 가까이 둘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술 관원장은 권력의 핵심에 있는 아주 대단한 위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성문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일차로 포로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다가 이방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성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수일 동안 슬피 울면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얻어 예루살렘 총독이 되어 자신이 그리로 가게 되었습니다. 총독으로 고국에 돌아온 느헤미야는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나 일반 백성들이나 제사장들에게까지 ‘예루살렘 성을 다시 쌓아서 다시는 수치를 받지 말자’고 도전합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호응하여 마음과 힘을 합해 성을 건축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 재건하는 것을 방해하고자  ‘너희들이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하며 위협했습니다. 그래도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성벽 쌓기를 계속했습니다. 이제 분노한 산발랏과 도비야는 더욱 심하게 비방하고 조롱했습니다. 산발랏이 말하기를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라고 비웃었고, 함께 있었던 도비야 역시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느 4:1-3)라고 하면서 조롱했습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123편은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기록된 시입니다. 그래서 본문 3,4절에 보면, “심한 멸시” “조소와 멸시”가 “넘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넘친다’는 말은 ‘만족하다, 포식하다’는 뜻입니다. 들소를 잡아먹은 사자가 포만감과 만족함 속에서 드러누워 쉬는 것처럼 지금 원수 대적들이 이스라엘을 놀리고 조롱하고 저주하고 방해하는 것을 즐기며 그것으로 아주 흡족해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이 아주 혼란스럽고 무질서합니다. 세계 모든 나라가 각기 어려운 상황에 빠졌습니다. 미국도 경제적인 침체, 사회적인 혼란, 정치인들의 무능, 게다가 도덕적 윤리적 가치 기준이 완전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뉴스를 통해서 대도시에서 일단의 무리가 떼를 지어서 백화점이나 가게에 쳐들어가 약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전에는 길거리에서 UPS와 Fedex 회사의 운송 밴을 공공연하게 털어가는 것을 보고서 ‘우리 사회가 이 정도로 망가지고 있구나, 이를 바로 잡을 힘이 없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가정에서 훈육을 바로 하지 못하고, 사회에서도 잘못을 책망할 어른이 없고, 정부도 무책임하게 방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개인과 가정과 국가적으로 영적 어두움이 더 깊어가는 현실입니다. 불의가 득세하고, 악한 자들이 의기양양하고 있습니다. 정직과 진실이 무시 당하고 조롱 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신앙으로 인해 사람들로 부터 멸시와 조소를 당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의한 삶의 가치관과 기준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비웃고 조롱하는 세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가 역사하는 불순종의 세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엡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사람들이 십자가 아래에서 조롱했습니다. 마태복음 27:39-4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이들의 말을 지금의 표현으로 하면 “자기나 잘하지!”, “꼴값 떨 때 알아봤어”는 식입니다. 예수님에게 무슨 죄와 허물이 있습니까? 메시아로서 군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낮춰 섬겼습니다. 병을 고치시며 귀신을 쫓으셨습니다. 말씀과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미워하며 조롱했습니다. 무능하게 잡혀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모습을 보고 멸시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십자가 밑에서 조롱할 때에, 물론 예수께서는 충분히 내려오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믿는 자들을 향해 비난하며 조롱할 때에, 마귀도 우리를 비방하며 참소할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인처럼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와 이 지독한 삶의 현실에서 건져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보라

우리는 기독교의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방해와 조롱과 핍박이 자주 행해졌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환란으로 인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심령이 되어 하나님께만 매달렸습니다. 이런 연단을 거쳐서 교회는 더욱 순결해 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신비는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은 자신이 가진 힘을 자랑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연약함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여 믿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인은 하나님을 가리켜 “하늘에 계신 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주, 곧 온 세상의 왕입니다.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며, 결정하시고, 인간의 행위를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코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보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시고, 장차 그 통치 아래 모든 피조물들이 복종하게 될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이런 분으로 알고 믿었기에 오늘 본문에서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몽골에서 선교 사역을 하던 어느 선교사님의 경험담입니다. 그는 말을 타고 드넓은 초원을 내달리는 상상을 늘 하면서, 이것이야 말로 몽골에 살며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럴 기회가 왔지만 그가 탄 말은 그의 기대대로 초원을 향해 내달리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자신의 등에 누가 탔건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땅에 처박은 체 풀을 뜯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발을 차가며 ‘의랴의랴’ 큰 소리로 외쳐도 꿈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본 몽골 친구가 슬며시 다가와 말을 뛰 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말의 고삐를 당겨 땅 위의 풀에 고정된 말의 눈(시선)을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초원으로 향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말은 ‘이럇’소리와 함께 힘껏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바라보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환경에 놓여 있을 때,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더욱 더 절망감이 들어 좌절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내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문제에 에워싸인 것처럼 답답한 상황일 때에 우리는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문제의 진정한 해결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나의 문제, 나의 이 지독한 환경이나 아픔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 가장 강하고, 가장 확실하게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따로 있다면 그를 향해 눈을 들고 바라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이 최고의 권력자라면 시인은 그 왕을 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없습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전능자이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소연합니다. 2절과 3절에서 세 번 반복하면서 긍휼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비록 받을 만한 자격이나 조건이 없지만 언약의 백성이니 가엾게 여겨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에 늘 불성실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언약에 성실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세운 언약을 자신이 깨뜨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새언약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언약에 성실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십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절망하지 않을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지켜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2. 겸손히 때를 기다리라

그런데 시인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태도가 어떻습니까? 본문 2절,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시인은 남종이 그 주인의 손을 바라보고, 여종이 그 안주인의 손을 바라보듯이 자신이 지금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종들이 주인의 지시를 받는 경우인데, 특히 식사 자리나 잔치 석상에서 주인의 지시를 받는 장면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말보다는 손 동작으로 종들에게 지시를 자주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삶의 양식이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기 때문에 그렇게 의사 표현하는 것이 훨씬 편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종들에게 지시할 때 말보다는 몸짓이나 손짓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합니다. 이를 위해서 종들은 손으로 전달하는 주인의 언어를 반드시 익혀야만 합니다. 이렇게 준비된 후에 실전에 배치되면, 우선 종은 주인과 그의 손이 잘 보이는 곳에 대기하며 서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종이 할 일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주인의 손, 주모의 손을 바라보며 대기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바라보다가 주인이 뭔가를 표시하려고 할 때 종들은 주의 깊게 살펴서 그 동작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즉각 행동에 옮겨야 했습니다. 

상상을 해 보십시오. 지금 주인을 섬기는 종은 주인을 볼 수 있는 곳에 서서 그의 눈은 항상 그 상전의 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인이 손으로 지시하면 즉각 행동합니다. 만약 종의 눈이 상전의 손을 유심히 살펴보지 아니하면, 주인의 원하는 행동을 할 수 없게 되고, 그래서 결국 주인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항상 상전의 손을 바라보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운동 경기에서는 사인을 주고 받는 것과 흡사합니다. 야구에서는 투수와 포수 사이에 가장 많이 사인이 오고 갑니다. 둘은 주로 손가락으로 사인을 주고 받습니다. ‘지금 타석에 들어선 선수가 네 공을 아주 잘 치고 있는데 걸러 낼래, 아님 정면으로 승부할래?’ 이렇게 서로 주고 받습니다. ‘공을 한 가운데로 빠르게 던질래, 아님 유인구로 바깥쪽으로 한 번 빼 볼래? 직구냐, 변화구냐, 아님 체인지업이나 커브를 던질 것이냐?’ 등 아주 복잡한 사인을 주고 받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선수들도 상대방 선수가 눈치채지 못하게 아주 다양한 사인을 감독과 주고 받습니다. 이 때 감독의 사인을 놓치면 아주 결정적 실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인을 주고 받을 때는 한상 주의깊게 상대방의 사인을 지켜 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종과 여종의 심정으로 주님을 주의깊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보내는 사인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치며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성경을 통해서, 때로는 기도 속에서, 찬송 속에서 사인이 올 수 있습니다. 또 일상 생활 중에서도 사인은 옵니다. 일 중에,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보려고 종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예전과 달리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비주얼을 강조하는 시대입니다. 스마트폰, 아이패드, 컴퓨터, TV 등등이 갖가지 영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많은 방해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세에 대해 말씀하실 때 (눅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마음이 둔해지고, 그만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잊고 살다가 홀연히 덫에 걸린 것처럼 될 것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 신앙인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생활의 염려’로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때에 대한 시그널을 주시는데 놓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운동 선수가 감독이 보내는 사인을 무시하거나, 딴 데 정신이 팔려서 그것을 보지 못하고 게임을 망치면, 그는 다음 게임에서 뛸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도 오로지 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눈을 주님에게 고정하고 주님이 주시는 사인을 기다리고 기다려야 합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포로에서 돌아왔다고 해도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뿔뿔이 흩어졌던 이스라엘 전체가 다 돌아온 것도 아닙니다. 거대한 바벨론 제국은 여전한 위협적이었고, 주변 여러 부족들 또한 사사건건 이스라엘을 방해하고 조롱하고 누명을 씌우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치열하고 각박한 현실의 한 복판에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당연히 온 세상의 왕이며, 자기 팀의 감독이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전쟁 필승의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뜻에서 시인은 “그 상전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종처럼, “그 주모의 손을” 바라보고 있는 여종 같이 되어서 주님의 뜻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피할 바위시오 도움이시오 구원자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절 후반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를 기다리는 것, 현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지금 패배한 듯 보이는 상황이 역전이 되고 승리가 확정될 때까지, 그때까지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화를 들었습니다. 어떤 분이 극장의 지배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제가 어젯밤 공연에 갔다가 아주 값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잃어 버렸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지배인은 ‘전화를 끊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고서는 곧바로 직원들에게 알아 보게 했더니 청소하면서 발견한 그 목걸이를 보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수화기를 다시 들고 보니 그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던 그 여인으로 부터 다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다리지 못합니다. 불안하고 초조해서 조급히 서두르다가 문제를 더 악화시킵니다. 그런데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시편 40:1-2)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때를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린 끝에 이삭을 얻었습니다. 요셉은 13년을 노예와 감옥속에서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40년을 광야에서 기다렸습니다.

우리도 겸손히 인내하며 기다리면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사인들이 올 것이고, 그로 인하여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결론:
우리 주위에는 개인적인 문제와 가정적인 문제로 힘들어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외로워하는 사람들, 질병으로 앓아 누워 있는 사람들, 사고와 재난으로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신앙이 무시를 당하고 조롱 받을 때,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 겨우 그 꼴이냐’고 멸시를 당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럴 때 주인의 손을 주목하여 바라보는 종의 심정으로 우리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눈을 고정시키며 바라보아야 합니다. 긍휼히 여겨 주시기를 바라며 끝까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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