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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2) (10.29.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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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09회 작성일 Oct 30 2023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10월 29일
본문: 로마서 8: 28-30
제목: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 (2)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종교 개혁가 존 칼빈 선생이 죽은 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도르트 회의에서 5대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이 5대 교리를 외우기 좋게 영어로 튤립(TULIP)이라고 합니다. Total Depravity(전적부패), Uncon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Limited Atonement(제한된 속죄),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 Perseverence of Saints(성도의 견인)입니다. 다섯 번 째가 Perseverance of Saints, 성도의 견인인데, 하나님께 선택받아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 안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이 힘을 주시고 위로하고 격려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견인’이란 한자로 굳을 견(堅), 참을 인(忍)자를 쓰는데 굳게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Perseverance로서 인내라는 말로 끝까지 오래참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신자들의 신앙은 마라톤과 비유되곤 합니다. 마라톤을 달리다보면 포기하기 싶은 충동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합니다. 숨이 차서 밀려 오는 고통과 다리가 아파서 그만 두고 싶은 고통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시험이나 질병, 물질의 유혹 아니면 세상 재미가 좋아서 중간에 신앙생활을 멈추고 곁길로 갈 충동을 느낍니다. 이럴 때마다 믿음의 확신이 없어지며 구원의 확신도 갖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도 이렇게 세상이 좋아 세상과 짝을 하며 사는 이중 신앙이 걱정이 됩니다. ‘내가 이렇게 살다가는 죽을 때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실까?’하는 걱정이 듭니다.

더구나 훗날 중한 병이 들어 더 이상 교회에 나올 수 없게 되었을 때, 고통이 갈 수록 심하여 더 이상 예배나 기도 조차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고민하게 됩니다. 혹시 내가 극한 통증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주님을 부인하고 배반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이런 염려와 걱정에 관련되는 교리가 바로 ‘성도의 견인’입니다. 빌립보서 1:6은 이에 대해서 잘 말씀하여 줍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사도 바울은 ‘내 안에서 착하고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즉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또는 주님이 이 세상에 재림하실 그날에 반드시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성도의 견인’의 교리가 구원의 확신과 아울러 담대히 신앙생활하는데 크게 유익합니다. 특히 고난 중에 있거나 영적 침체에 빠진 이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반면에 이를 잘못 이해하면 도리어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의 교리를 ‘한 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는다’는 식으로 해석하여 영적 나태와 방종을 합리화 시키는 위험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견인’의 한자를 잘못 이해해서 생기는 일입니다. 굳을 ‘견(堅)’과 참을 ‘인(忍)’대신에 끌 ‘견(牽)’과 당길 ‘인(引)’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말이고, 그것도 위험한 착각입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의 어떤 의지적 노력 없이도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저절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단 구원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끝까지 강제로 끌고 가심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우리의 구원이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계속 타락의 길로 나아간다면 필경 멸망할 것을 경고합니다.

이와 연관해서 궁금한 질문이 있습니다. 한 때 교회에 열심히 다니다가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새벽기도회도 빠지지 않고, 봉사도 열심히 하던 사람이 그만 세상에 빠져서 살아가기도 하고, 심지어 이단이나 사이비 단체로 넘어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과연 ‘성도의 견인’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의심이 생깁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요한일서 2: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저들의 신앙생활의 겉모습을 보고서 우리와 함께 속한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나간 것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제자중 가롯 유다가 있습니다. 유다는 단순히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12제자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도 다른 제자들처럼 파송을 받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고 병도 고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반하여 은 30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고 자살이라는 비참한 최후를 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주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올바르게 ‘성도의 견인’의 교리를 이해하게 된다면 결코 우리를 나태와 방종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도리어 더욱 더 담대히 믿음의 길로 나아가도록 믿음과 확신을 불어넣어 줍니다. 고난 중에도 오래참고 인내하게 합니다.

로마서 8장은 바로 우리 구원에 대한 확신의 근거를 세 가지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 곧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습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아서 하나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우리의 구원은 실패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우리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성령님이 도우십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도록 하십니다(13절).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26절).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끔 무조건적으로 구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서 내 뜻대로 기도하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친히 우리를 위해 탄식하는 기도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또한 친히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심으로써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불완전한 기도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리고 셋째로, 절대적인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과 주권입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서 ‘모든 것’이라고 했는데 좋은 일, 나쁜 일, 즐거운 일과 슬픈 일, 성공과 실패, 고통과 아픔, 이 모든 것도 포함됩니다. 심지어 잘못된 선택과 결정으로 쓰디 쓴 후회와 통한을 남긴 일도 하나님은 선용하십니다. 그래서 선을 이루십니다. 여기서 ‘선’이란 최종적으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처럼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 주님의 얼굴을 마주 대할 것입니다.

1.

오늘 본문 30절에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다섯 개의 능동태 동사를 사용하여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정점이자 완성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1) 미리 아심
29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아셨다고 하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미리 아셨다고 하는 것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조건으로 나의 선이나 공로가 될만한 무엇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누군가를 ‘아신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고 사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마 7:23)라고 하셨는데 이는 그 사람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아셨다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여 하나님 자녀로 관계를 맺기로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에 이미 우리 개개인을 미리 아셨다는 사실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미리 정하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미리 아시고, 그 다음 우리를 미리 정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적지를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그와 함께 영화롭게 되는 것을 목표로 정하셨습니다. 그날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가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그 과정은 마치 광야 길을 걷는 것과 같지만 결국 안식의 땅에 도달하도록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이며 무한한 자비입니다.

3) 부르심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 부르심을 받으면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고, 그분을 사랑하게 됩니다. 2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에는 우리의 감정, 지식, 의지와 행동 등 모든 것이 다 포함됩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그에게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있을 때 그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을 때 성령 하나님이 직접 우리 안에 일으키는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4) 의롭다 하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어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우리를 영원 전 부터 미리 아셨고, 정하셨고, 이제 의롭다 하시고, 장차 영화롭게 하시는 단계로 우리를 끌어 올리시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와 구원 역사에 연결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알고 부르시지 않으셨다면 어느 누구도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5) 영화롭게 하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마지막 날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그분을 직접 보며 영원히 사는 영생의 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우리의 썩은 몸은 새 몸을 입고 부활하여 우리 영혼과 결합하게 됩니다. 우리 몸이 구속을 받게 되면 우리 자신은 완전 무결한 새 인격인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새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되며 영화롭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그리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반드시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계획대로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은 그 누구도 방해 할 수 없으며 설혹 방해가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은 자기의 계획대로 이루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구원 계획을 확실히 이루시는 분입니다.
구원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헬라어 원문을 보면 29, 30절에 ‘하나님이’라는 주어가 8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전지 전능하시고, 영존 하시는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다섯 개의 동사가 전부 과거 동사로 쓰여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셨다’, ‘정하셨다’, ‘부르셨다’, ‘의롭게 하셨다’, ‘영화롭게 하셨다’, 이 모든 일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정도로 확실하게 해 놓으신 것입니다. 물론 5가지 단계 가운데서 영화롭게 하는 일은 우리에게 아직 도래하지 아니한 미래의 사건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나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은 창세 전에 미리 계획해 놓으신 일이기 때문에 분명히 성취됩니다. 하나님에게는 계획이 곧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가 말하기를 “미래에 일어날 일을 과거시제를 사용하여 표현한 것은 신약을 통틀어서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가장 담대한 기대입니다.”(제임스 데니)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오늘 본문은 우리 구원의 주체가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인 것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고 분명합니다. 만약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변수가 많고 불안정하겠습니까? 당연히 우리의 구원도 불확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섭리하여 이루시니 우리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이런 확신이 있기에 우리는 고난 중에도 인내하며 오래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고 인내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셔서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삶을 인도하셔서 천국에 이르도록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2.

물론 이 다섯 단계를 거치는 과정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순탄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영화롭게 되는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거쳐갑니다. 그런데 도중에 고난이나 시련으로 완전히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경우를 통해서 이 진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는 만찬임에도 제자들은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엉뚱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눅 22:24)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지금 제자들은 마치 자기 엄마가 세상 떠난 줄도 모르고 뛰노는 철없는 아이와도 같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자 모든 제자들은 깜짝 놀랐어요. 이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예수님! 다른 제자들은 다 주님을 버릴찌라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마 26:33)라고 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자랑이라도 하듯 호언장담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 자신보다 베드로를 더 잘 알고 계셨어요. 예수님은 베드로를 넘어뜨리기 위한 사단의 도전이 얼마나 거센지, 그리고 이 도전 앞에 서있는 베드로의 모습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알고 계셨어요. “시몬 베드로야! 사단이 밀을 까부르는 것처럼 너희를 시험하려 하고 있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너희 믿음이 약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너는 회개하고 어떤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도 다른 제자들의 믿음을 굳세게 해주는 일을 하거라!”

그런데도 베드로는 자신만만했습니다. “예수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주님과 함께 감옥이나 죽는 곳에라도 어느 곳이나 다 따라가겠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에 예수님이 앞으로 되어 질 일을 말씀해 주십니다. “베드로야! 내가 진실로 네게 말하는데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후에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잘 압니다. 결국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합니다. 세 번째는 아주 맹세까지 하면서 부정합니다. 어찌된 것일까요? 그의 맹세는 거짓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님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굳게 결심했어요. 그런데 그 결말은 배신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가 도중에 배신하기로 마음을 바꾸었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도 내놓겠다는 그의 마음은 진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미처 알지 못하고 간과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 목숨이 더욱 소중하기에, 얼마든지 주님을 배반할 수 있는 또 다른 한 면이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베드로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신 안에 이런 부분이 있다는 것을 베드로는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호언장담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에서 표현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게 되더라”고 말합니다. 이 영적 상태에 대해서 ‘내 안에 내가 아닌 또 다른 자아가 존재한다’고 진단합니다. 그래서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8절)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9절) 우리에게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 모순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3장 38절에서 충성을 맹세하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지금까지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올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이었어요. 예수님은 곧 사단이 베드로를 넘어뜨리기 위해 밀 까부르듯이 무섭게 흔들어 댈 것을 압니다. 지금은 베드로가 큰 소리를 치고 있어요. 그런데 마치 공중에서 맴돌던 매가 목표를 발견하자 급강하하여 병아리를 낚아채듯이 조만간 사단이 두려움으로 엄습할 때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망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세 번이나 부인할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가 그 실패로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그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을 보았습니다. 회복될 것을 알았습니다. (눅 22:32)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when you have turned back, strengthen your brothers.”

'돌이키면'이 아니라(not if you have turned back) '돌이킨 후에'(when you have turned back)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붙잡고 가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그를 붙잡아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비록 베드로가 사단의 공격에 노출되어 마치 밀 까부르듯이 키질을 당하였지만 결코 베드로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회복되고, 신약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통한의 실패를 했던 베드로이지만 훗날 얼마나 거룩한 사도의 모습으로 변화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베드로전서,후서를 읽게 되면 복음서에서 보여진, 충동적이고 혈기가 강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온유하고 겸손한 사도의 모습이 흠뻑 배어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결코 방치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붙잡고 계십니다. 그 누구도 이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아셨고 택하셨습니다. 택하신 우리를 부르셨고, 또한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행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결코 무너지거나 실패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믿음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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