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당신은 무엇을 심고 계십니까? (06.28.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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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1회 작성일 Jun 29 2026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6월 28일
본문: 갈라디아서 6:7-10
제목: 오늘 당신은 무엇을 심고 계십니까?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난 세 주에 걸쳐 노아의 시대와 롯의 시대를 묵상하며 우리 시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노아의 시대 사람들도, 소돔 사람들도, 먹고 마셨습니다. 결혼도 했습니다. 사고 팔며 사업도 했습니다. 그리고 집을 짓는 평범한 일상을 살았습니다. 겉으로 보면 특별할 것이 없는 하루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일상을 살았어도 마지막은 전혀 달랐습니다. 누군가는 방주 안으로 들어가 생명을 얻었고, 누군가는 소돔을 떠나 구원을 얻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맞이 했습니다.
주님은 모든 말씀을 마치시며 짧지만 잊을 수 없는 한마디를 남기셨습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이 한 사람의 삶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의 마음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오늘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표현을 조금 다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주님은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가?”를 물으셨다면, 바울은 “오늘 무엇을 심고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결국 같은 질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당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오늘 조금 미워하고, 기도하지 않고, 당분간 예배를 소홀히 해도 괜찮겠지’라며 속아 넘어갑니다. 그러나 농부는 압니다. 땅속에 묻혀 있는 씨앗은 살아 있다는 것을. 봄에 씨를 뿌립니다. 다음 날 밭에 나갑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다음 날 나갑니다. 역시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땅 속에 묻힌 씨앗은 반드시 싹이 나고 자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단지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그렇습니다. 오늘 심는 생각이 내일의 인격이 되고, 오늘 심는 말이 내일의 관계가 되며, 오늘 심는 습관이 내일의 삶이 되고, 오늘 심는 믿음이 영원을 준비합니다.
농부는 씨앗을 속일 수 없듯이, 우리의 삶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매우 엄숙히 말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여러분, 왜 바울은 이렇게까지 강한 표현으로 사용했을까요? 오늘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왜 바울은 “속지 말라”고 말하는가?
오늘 본문 7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사람이 가장 쉽게 속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사단입니까? 세상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이 가장 잘 속이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관대합니다. 죄는 쉽게 합리화하고, 불순종은 상황 탓으로 돌리며, 게으름은 피곤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합니다. 악해서라기보다 당장 눈앞에 결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기도를 쉬어도 내 삶에 무너지지 않고, 오늘 조금 미워해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하고 마취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영적 마취 상태를 깨우기 위해 이 엄한 사랑의 경고를 던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특별히 경계한 자기 기만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복음을 왜곡하는 두 가지 극단입니다.
첫 번째는 율법주의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는 거짓 교사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율법도 철저히 지켜야 하나님께 인정받습니다.” 겉으로 보면 매우 경건해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복음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만큼 봉사했으니 하나님도 축복하셔야 합니다.” “내가 새벽기도를 수십 년 했으니 하나님도 내 기도를 들어주셔야 합니다.” “내가 십일조를 성실히 했으니 하나님도 나를 인정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계산입니다. 은혜가 아니라 거래입니다.
복음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자신의 생명을 심으셨습니다. 주님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께 인정 받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거짓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율법주의와는 정반대입니다. 바로 방종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차피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이제 내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지 않은가?” “율법에서 자유를 얻었는데 굳이 신앙 훈련을 할 필요가 있나?”
바울은 이것도 복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참된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은혜는 게으름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랑은 사람을 움직입니다. 십자가를 깊이 경험한 사람은 억지로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억지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합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는 “오늘도 밥을 해줘야 하나?”라고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수고를 기쁨으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복음도 그렇습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은 의무 때문에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격 때문에 순종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주의와 방종이라는 두 극단을 모두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우리를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초청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성령을 따라 심는 사람들입니다. 이 복음 위에 설 때에만, 오늘 본문의 말씀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은혜로운 초청이 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이제 우리에게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오늘 당신은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2.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성도 여러분, 복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방종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기쁘게 순종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말한 후 곧바로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여기서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는 말은 원어로 ‘코웃음치다’, ‘비웃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강한 표현입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겉모습만 보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목회자를 속일 수 있습니다. 가족도 속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 삶을, 우리의 고백이 아니라 심은 씨앗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 물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너는 무엇을 심고 있느냐?”
이 질문 앞에서 아무도 변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낸 오늘 하루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일 우리는 무언가를 심고 있습니다. 오늘의 생각이 씨앗입니다. 오늘의 말이 씨앗입니다. 오늘의 선택이 씨앗입니다. 오늘의 소비가 씨앗입니다. 오늘의 스마트폰 사용도 씨앗입니다. 오늘의 인터넷 검색도 씨앗입니다. 오늘의 인간관계도 씨앗입니다. 오늘의 기도도 씨앗입니다. 오늘의 예배도 씨앗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무언가를 심고 있습니다. 문제는 ‘'심느냐, 심지 않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심느냐’입니다.
이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우리는 흔히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을 술이나 음란 같은 눈에 보이는 죄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육체는 훨씬 넓은 의미입니다. 바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삼은 겉으로 볼 때 매우 종교적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봉사하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내 성공을 더 사랑하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거래로 기도한다면 그것 역시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고, 세상의 성공으로 나의 가치를 결정하려는 마음이 결국 육체의 씨앗입니다. 육체는 단지 세상 유흥가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우리의 봉사와 기도 속에서도 자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마음은 끝까지 자기 자신을 붙드는 삶, 자기 영광과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그것이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완벽한 신앙생활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날마다 성령께 자신을 맡기는 삶입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는 것입니다. 내 감정보다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내 욕심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넘어진 형제를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잘되지 않아도 다시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말씀이 잘 읽히지 않아도 다시 성경을 펴는 것입니다. 예배가 습관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임을 기억하며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은 거창한 영웅적 결단보다, 매일의 작은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농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농부는 봄에 씨를 뿌려 놓고 다음 날 열매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씨를 뿌립니다. 물을 줍니다. 잡초를 뽑습니다. 기다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농부는 생명을 만들 수 없습니다. 씨앗 속에서 생명이 움트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햇빛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비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생명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농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농부는 자라게 할 수는 없지만, 심을 책임은 있습니다. 물을 주며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 게으름 가운데 역사하지 않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순종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공동체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책임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책임을 없애지 않고, 책임이 은혜를 대신하지도 않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순종을 가능하게 하고, 순종은 은혜의 열매가 됩니다.
영성가 Dallas Willard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혜는 노력(Earning)의 반대이지, 훈련의 반대가 아닙니다.” 참으로 깊은 통찰입니다. 그러나 훈련이 우리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바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훈련 자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신뢰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일하시는 통로를 소홀히 여기지도 않습니다. 기도는 점수를 따기 위한 숙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의 대화입니다. 말씀 묵상은 의무가 아닙니다. 생명의 양식을 먹는 식탁입니다. 예배는 종교 행사가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이 원리를 구약의 엘리 제사장 가문이 잘 보여줍니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누구보다 은혜의 자리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성막에서 자랐습니다. 제사장이었습니다. 말씀을 들었습니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자기 탐욕을 심었습니다. 은혜 가까이에 있는 것과 은혜를 누리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은혜의 자리에 있었지만, 은혜를 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이 거둔 것은 영광이 아니라 심판이었습니다. 한 날 두 형제가 전쟁터에서 죽습니다. 엘리 제사장도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한 가정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경고가 됩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저절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직분이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은혜의 자리 가까이에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도 성령을 위하여 심고 있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령을 위해 심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우리는 흔히 골방의 기도나 성경 읽기를 떠올리지만,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나 혼자만의 경건의 탑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갈 5장)는 모두 ‘관계’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서는 사랑을 할 수 없고, 나 혼자서는 오래 참을 수 없고, 나 혼자서는 자비를 베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씨앗이 자라는 진짜 경작지는 바로 ‘공동체’입니다.
3. 성령의 씨앗은 공동체 안에서 자랍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 우리의 골방보다 먼저 우리의 이웃을 바라보게 합니다. 1절에서는 범죄한 형제를 회복시키라고 말합니다. 2절에서는 짐을 서로 지라고 말합니다. 6절에서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나누라고 말합니다. 10절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들을 읽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형제,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 믿음의 가족들, 그리고 모든 사람. 왜입니까? 성령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떼어 놓아 거룩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서로 사랑하게 하심으로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혼자 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서 깊어집니다.
첫째, 성령은 우리를 회복시키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6장 1절에서 바울은 범죄한 형제를 온유하게 바로잡으라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죄보다 회복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실패한 사람을 쉽게 버립니다. 그러나 교회는 버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회복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용서를 받아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말을 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말을 심는 것입니다. 비난을 심는 것이 아니라, 격려를 심는 것입니다. 정죄를 심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심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은 우리를 나누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2절에서는 짐을 서로 지라고 말합니다. 6절에서는 좋은 것을 함께 나누라고 말합니다. 결국 같은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도 나눕니다. 시간도 나눕니다. 기도도 나눕니다. 눈물도 나눕니다. 물질도 나눕니다. 복음은 내 것을 움켜쥐게 하지 않습니다. 내 것을 흘려보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성령은 우리를 끝까지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바울은 9절과 10절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왜냐하면 사랑은 금방 열매를 맺지 않기 때문입니다. 용서도 시간이 걸립니다. 기도도 시간이 걸립니다. 사람도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랑도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지금 오랫동안 기도하는 자녀가 있습니까? 오랫동안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가족이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심어라.” 왜냐하면 열매는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에 맺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갈라디아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을 놀라운 기적이나 특별한 은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 한 사람의 짐을 함께 나눠지는 것, 한 사람과 좋은 것을 나누는 것, 한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 결국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은 사람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한 가지 질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바울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영생을 거둡니다. 그리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은 특별한 삶이 아닙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서로의 짐을 함께 지며, 선을 행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혼자 믿도록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함께 심고 함께 거두는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에서 목장 모임을 갖는 이유입니다. 목장 식구의 허물을 온유함으로 회복시키고, 서로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 지며,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선을 심는 자리가 바로 우리의 목장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심습니다. 섬김을 심습니다. 선을 심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에게는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심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심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입니다. 예수께서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심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 사랑 때문에 심습니다. 사랑받기 위해 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받았기에 심습니다. 구원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기에 순종합니다.
혹시 지금까지 육체를 위하여 많은 것을 심어 오셨습니까?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회개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씨앗을 주십니다.
어떤 분들은 오랫동안 눈물로 심어 오셨을 것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기도, 묵묵한 섬김, 말없이 흘린 눈물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낙심하지 말라. 때가 되면 거두리라.”
오늘 여러분이 심는 씨앗이 내일의 인생이 됩니다. 그러므로 새로 시작하는 한 주도 사랑을 심으십시오. 용서를 심으십시오. 격려를 심으십시오. 복음을 심으십시오. 그리고 그 모든 씨앗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성령을 위하여 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날짜: 2026년 6월 28일
본문: 갈라디아서 6:7-10
제목: 오늘 당신은 무엇을 심고 계십니까?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난 세 주에 걸쳐 노아의 시대와 롯의 시대를 묵상하며 우리 시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노아의 시대 사람들도, 소돔 사람들도, 먹고 마셨습니다. 결혼도 했습니다. 사고 팔며 사업도 했습니다. 그리고 집을 짓는 평범한 일상을 살았습니다. 겉으로 보면 특별할 것이 없는 하루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일상을 살았어도 마지막은 전혀 달랐습니다. 누군가는 방주 안으로 들어가 생명을 얻었고, 누군가는 소돔을 떠나 구원을 얻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맞이 했습니다.
주님은 모든 말씀을 마치시며 짧지만 잊을 수 없는 한마디를 남기셨습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이 한 사람의 삶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의 마음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오늘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표현을 조금 다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주님은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가?”를 물으셨다면, 바울은 “오늘 무엇을 심고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결국 같은 질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당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오늘 조금 미워하고, 기도하지 않고, 당분간 예배를 소홀히 해도 괜찮겠지’라며 속아 넘어갑니다. 그러나 농부는 압니다. 땅속에 묻혀 있는 씨앗은 살아 있다는 것을. 봄에 씨를 뿌립니다. 다음 날 밭에 나갑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다음 날 나갑니다. 역시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땅 속에 묻힌 씨앗은 반드시 싹이 나고 자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단지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그렇습니다. 오늘 심는 생각이 내일의 인격이 되고, 오늘 심는 말이 내일의 관계가 되며, 오늘 심는 습관이 내일의 삶이 되고, 오늘 심는 믿음이 영원을 준비합니다.
농부는 씨앗을 속일 수 없듯이, 우리의 삶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매우 엄숙히 말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여러분, 왜 바울은 이렇게까지 강한 표현으로 사용했을까요? 오늘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왜 바울은 “속지 말라”고 말하는가?
오늘 본문 7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사람이 가장 쉽게 속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사단입니까? 세상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이 가장 잘 속이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관대합니다. 죄는 쉽게 합리화하고, 불순종은 상황 탓으로 돌리며, 게으름은 피곤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합니다. 악해서라기보다 당장 눈앞에 결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기도를 쉬어도 내 삶에 무너지지 않고, 오늘 조금 미워해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하고 마취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영적 마취 상태를 깨우기 위해 이 엄한 사랑의 경고를 던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특별히 경계한 자기 기만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복음을 왜곡하는 두 가지 극단입니다.
첫 번째는 율법주의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는 거짓 교사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율법도 철저히 지켜야 하나님께 인정받습니다.” 겉으로 보면 매우 경건해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복음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만큼 봉사했으니 하나님도 축복하셔야 합니다.” “내가 새벽기도를 수십 년 했으니 하나님도 내 기도를 들어주셔야 합니다.” “내가 십일조를 성실히 했으니 하나님도 나를 인정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계산입니다. 은혜가 아니라 거래입니다.
복음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자신의 생명을 심으셨습니다. 주님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께 인정 받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거짓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율법주의와는 정반대입니다. 바로 방종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차피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이제 내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지 않은가?” “율법에서 자유를 얻었는데 굳이 신앙 훈련을 할 필요가 있나?”
바울은 이것도 복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참된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은혜는 게으름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랑은 사람을 움직입니다. 십자가를 깊이 경험한 사람은 억지로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억지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합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는 “오늘도 밥을 해줘야 하나?”라고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수고를 기쁨으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복음도 그렇습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은 의무 때문에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격 때문에 순종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주의와 방종이라는 두 극단을 모두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우리를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초청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성령을 따라 심는 사람들입니다. 이 복음 위에 설 때에만, 오늘 본문의 말씀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은혜로운 초청이 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이제 우리에게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오늘 당신은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2.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성도 여러분, 복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방종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기쁘게 순종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말한 후 곧바로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여기서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는 말은 원어로 ‘코웃음치다’, ‘비웃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강한 표현입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겉모습만 보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목회자를 속일 수 있습니다. 가족도 속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 삶을, 우리의 고백이 아니라 심은 씨앗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 물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너는 무엇을 심고 있느냐?”
이 질문 앞에서 아무도 변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낸 오늘 하루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일 우리는 무언가를 심고 있습니다. 오늘의 생각이 씨앗입니다. 오늘의 말이 씨앗입니다. 오늘의 선택이 씨앗입니다. 오늘의 소비가 씨앗입니다. 오늘의 스마트폰 사용도 씨앗입니다. 오늘의 인터넷 검색도 씨앗입니다. 오늘의 인간관계도 씨앗입니다. 오늘의 기도도 씨앗입니다. 오늘의 예배도 씨앗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무언가를 심고 있습니다. 문제는 ‘'심느냐, 심지 않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심느냐’입니다.
이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우리는 흔히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을 술이나 음란 같은 눈에 보이는 죄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육체는 훨씬 넓은 의미입니다. 바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삼은 겉으로 볼 때 매우 종교적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봉사하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내 성공을 더 사랑하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거래로 기도한다면 그것 역시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고, 세상의 성공으로 나의 가치를 결정하려는 마음이 결국 육체의 씨앗입니다. 육체는 단지 세상 유흥가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우리의 봉사와 기도 속에서도 자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마음은 끝까지 자기 자신을 붙드는 삶, 자기 영광과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그것이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완벽한 신앙생활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날마다 성령께 자신을 맡기는 삶입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는 것입니다. 내 감정보다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내 욕심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넘어진 형제를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잘되지 않아도 다시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말씀이 잘 읽히지 않아도 다시 성경을 펴는 것입니다. 예배가 습관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임을 기억하며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은 거창한 영웅적 결단보다, 매일의 작은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농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농부는 봄에 씨를 뿌려 놓고 다음 날 열매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씨를 뿌립니다. 물을 줍니다. 잡초를 뽑습니다. 기다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농부는 생명을 만들 수 없습니다. 씨앗 속에서 생명이 움트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햇빛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비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생명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농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농부는 자라게 할 수는 없지만, 심을 책임은 있습니다. 물을 주며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 게으름 가운데 역사하지 않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순종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공동체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책임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책임을 없애지 않고, 책임이 은혜를 대신하지도 않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순종을 가능하게 하고, 순종은 은혜의 열매가 됩니다.
영성가 Dallas Willard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혜는 노력(Earning)의 반대이지, 훈련의 반대가 아닙니다.” 참으로 깊은 통찰입니다. 그러나 훈련이 우리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바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훈련 자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신뢰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일하시는 통로를 소홀히 여기지도 않습니다. 기도는 점수를 따기 위한 숙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의 대화입니다. 말씀 묵상은 의무가 아닙니다. 생명의 양식을 먹는 식탁입니다. 예배는 종교 행사가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이 원리를 구약의 엘리 제사장 가문이 잘 보여줍니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누구보다 은혜의 자리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성막에서 자랐습니다. 제사장이었습니다. 말씀을 들었습니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자기 탐욕을 심었습니다. 은혜 가까이에 있는 것과 은혜를 누리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은혜의 자리에 있었지만, 은혜를 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이 거둔 것은 영광이 아니라 심판이었습니다. 한 날 두 형제가 전쟁터에서 죽습니다. 엘리 제사장도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한 가정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경고가 됩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저절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직분이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은혜의 자리 가까이에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도 성령을 위하여 심고 있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령을 위해 심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우리는 흔히 골방의 기도나 성경 읽기를 떠올리지만,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나 혼자만의 경건의 탑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갈 5장)는 모두 ‘관계’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서는 사랑을 할 수 없고, 나 혼자서는 오래 참을 수 없고, 나 혼자서는 자비를 베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씨앗이 자라는 진짜 경작지는 바로 ‘공동체’입니다.
3. 성령의 씨앗은 공동체 안에서 자랍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 우리의 골방보다 먼저 우리의 이웃을 바라보게 합니다. 1절에서는 범죄한 형제를 회복시키라고 말합니다. 2절에서는 짐을 서로 지라고 말합니다. 6절에서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나누라고 말합니다. 10절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들을 읽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형제,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 믿음의 가족들, 그리고 모든 사람. 왜입니까? 성령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떼어 놓아 거룩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서로 사랑하게 하심으로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혼자 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서 깊어집니다.
첫째, 성령은 우리를 회복시키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6장 1절에서 바울은 범죄한 형제를 온유하게 바로잡으라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죄보다 회복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실패한 사람을 쉽게 버립니다. 그러나 교회는 버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회복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용서를 받아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말을 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말을 심는 것입니다. 비난을 심는 것이 아니라, 격려를 심는 것입니다. 정죄를 심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심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은 우리를 나누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2절에서는 짐을 서로 지라고 말합니다. 6절에서는 좋은 것을 함께 나누라고 말합니다. 결국 같은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도 나눕니다. 시간도 나눕니다. 기도도 나눕니다. 눈물도 나눕니다. 물질도 나눕니다. 복음은 내 것을 움켜쥐게 하지 않습니다. 내 것을 흘려보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성령은 우리를 끝까지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바울은 9절과 10절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왜냐하면 사랑은 금방 열매를 맺지 않기 때문입니다. 용서도 시간이 걸립니다. 기도도 시간이 걸립니다. 사람도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랑도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지금 오랫동안 기도하는 자녀가 있습니까? 오랫동안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가족이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심어라.” 왜냐하면 열매는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에 맺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갈라디아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을 놀라운 기적이나 특별한 은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 한 사람의 짐을 함께 나눠지는 것, 한 사람과 좋은 것을 나누는 것, 한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 결국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은 사람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한 가지 질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바울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영생을 거둡니다. 그리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은 특별한 삶이 아닙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서로의 짐을 함께 지며, 선을 행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혼자 믿도록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함께 심고 함께 거두는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에서 목장 모임을 갖는 이유입니다. 목장 식구의 허물을 온유함으로 회복시키고, 서로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 지며,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선을 심는 자리가 바로 우리의 목장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심습니다. 섬김을 심습니다. 선을 심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에게는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심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심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입니다. 예수께서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심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 사랑 때문에 심습니다. 사랑받기 위해 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받았기에 심습니다. 구원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기에 순종합니다.
혹시 지금까지 육체를 위하여 많은 것을 심어 오셨습니까?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회개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씨앗을 주십니다.
어떤 분들은 오랫동안 눈물로 심어 오셨을 것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기도, 묵묵한 섬김, 말없이 흘린 눈물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낙심하지 말라. 때가 되면 거두리라.”
오늘 여러분이 심는 씨앗이 내일의 인생이 됩니다. 그러므로 새로 시작하는 한 주도 사랑을 심으십시오. 용서를 심으십시오. 격려를 심으십시오. 복음을 심으십시오. 그리고 그 모든 씨앗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성령을 위하여 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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