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일상, 다른 운명 (06.21.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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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71회 작성일 Jun 22 2026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6월 21일
본문: 누가복음 17:34-37
제목: 같은 일상, 다른 운명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성도 여러분, 오랜 세월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해왔는데도 문득문득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지 않으십니까? 교회에서는 세상 둘도 없는 천사 같은 목사와 성도인데, 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사소한 일에 벌컥 화를 냅니다. 일터에서 잔뜩 얻은 스트레스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내 아내에게, 내 남편에게, 내 자녀들에게 짜증으로 쏟아내고 마는 내 못난 모습을 봅니다. 주일에는 거룩하게 예배드리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돈에 매달리고, 아등바등 집착하며 살아갑니다. 그 위선적인 내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에 차가운 질문이 던져집니다.”너 진짜 예수 믿는 사람 맞니? 너 그러고도 정말 구원받은 성도 맞니?” 예수를 믿는데도 내 인생에 아무런 영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 속에 감추어진 놀라운 반전이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여러 교인들이 오랜만에 고국을 방문해,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옛 친구를 만났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아주 세련되고 여유롭게 사는 친구 앞에 앉아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위축되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아, 나는 그동안 뭘 하고 살았나…’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똑같은 교실에서 공부했고, 똑같은 추억을 나눈 단짝이었는데 말입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니까 그 친구는 인생의 ‘주인공’ 같고, 나는 초라한 ‘엑스트라’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대화가 점점 깊어지면서, 마음에 전혀 다른 차원의 깨달음과 신선한 충격이 옵니다. 바로 평생 하나님 없이 살아온 친구의 숨은 뒷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돈과 성공,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친구의 화려함 뒤에는, 채워지지 않는 지독한 허무와 영적인 어둠이 감춰져 있었습니다. 반면에 비록 매일 넘어지고 여전히 부족할지라도, 내 안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있습니다. 영원을 바라보는 소망이 있습니다. 삶의 가치관과 목적이 완전히 달라져 있는 내 자신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영원의 렌즈를 끼고 다시 내 인생을 바라보게 됩니다. 겉보기에는 친구가 주인공 같고 내가 엑스트라 같았는데, 실상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복음이 우리의 운명을 이미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아, 우리는 매일 똑같은 해를 보고 똑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걷고 있는 길은 완전히 다르구나!’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의 짧은 인생도 겉모습과 실상의 길이 이렇게 갈라지는데, 하물며 마지막 날 ‘영원’ 앞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일어날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겉으로는 구별이 되지 않으나, 실상은 완전히 분리되는 최종적인 심판입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 하나님께서 마침내 영원한 갈래 길을 펼치십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완벽하게 똑같아 보이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평범한 삶의 한복판에서, 그들의 운명은 영원히 갈라지게 됩니다. 바로, ‘같은 일상’을 살았으나 ‘다른 운명’을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오늘 밤 주님이 오신다면, 매일 아침 같은 밥상에 앉던 우리 가족은, 매주 같은 자리에서 찬양하던 우리 교인들은 다 함께 그 나라에 올라갈 수 있을까요? 성경은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겉보기엔 똑같아 보일지라도, 그 운명은 영원히 갈라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과연 이들의 운명을 무엇이 갈라놓았는지 말씀해 줍니다. 본문 34절과 35절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둘이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눅 17:34–35)
1. 하나님만 아시는 결정적 차이
여기서 우리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똑같은 여건에서 똑같이 일을 하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는가? 무엇이 이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는가?”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겉으로는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밤에 한 침대에 누워 있는 부부나 가족, 낮에 일터에서 함께 맷돌을 갈고 있는 동료들—이들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완벽하게 동일한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우리는 누가복음 전체를 연결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전체를 따라가 보면, 예수님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자기 나라 사이의 갈림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을 쌓아두며 “내 영혼아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자” 했던 어리석은 부자의 비극을 기억하십니까? 큰 잔치에 초대받았으나 밭을 샀고 소를 시험해야 하며 장가를 들어서 잔치에 갈 수 없다고 했던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겉으로는 성실한 일상생활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초청과 통치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왕국을 견고히 세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중심’의 문제입니다. “지금 현재, 내 삶의 중심에 누가 앉아 계시는가”이것이 문제입니다.
같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지만, 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다스림을 구하며 눈을 감고, 다른 한 사람은 오직 자신의 안위와 자기 왕국을 확장할 생각으로 밤을 맞이합니다.
같은 직장에서 함께 일하지만, 한 사람은 이 일터를 하나님이 보내신 사명의 자리로 여기며 그리스도의 대사로 살아가고, 다른 한 사람은 그저 돈과 성공이라는 세상 나라의 법을 따르며 살아갑니다.
심지어 같은 예배당 의자에 앉아 예배를 드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오직 주님의 통치 앞에 무릎을 꿇지만, 다른 한 사람은 익숙한 종교적 루틴에 만족하며 자기 인생의 중심에 여전히 자신이 왕이 되어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 재림 때 들림과 버림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완전히 새로운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 이 땅에서 누구의 다스림을 받으며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 살았는지, 이것이 마지막 날 숨김없이 다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평소에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다스림을 기뻐하던 자들은, 주님이 오시는 그날 자연스럽게 그 영광의 나라로 데려감을 당할 것입니다. 반면에 평생 자기가 왕이 되어 오직 자기 자신의 배만을 위해 살던 자들은 그대로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 이 최종적인 분리는 겉으로는 동일한 일상을 살아가지만 이미 우리 중심에서 결정됩니다.
2. 주검이 있는 곳에 모이는 독수리
주님의 이 엄중한 분리의 말씀을 듣자 제자들은 큰 충격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물었습니다. “주님, 어디오니이까? 이 무서운 분리와 심판이 도대체 어디서 일어나는 것입니까?”
제자들은 심판이 임하는 특별한 ‘장소’가 따로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타락한 이방 도시나 로마의 궁궐 같은 곳에 심판이 임할 것이고, 자신들이 서 있는 유대의 성전이나 종교적 울타리 안은 안전지대일 것이라 확신했을지 모릅니다. 즉 “어디로 피해야 안전합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은, 바로 그 안전지대를 확인하고 싶었던 종교적 본능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이 가진 고정관념을 단숨에 깨부수는 충격적인 이미지 하나로 답하십니다. 37절 후반절입니다. “이르시되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눅 17:37)
이 말씀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쓰이던 속담이었습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의도가 무엇일까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 떼가 순식간에 하늘에서 내리앉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칙입니다. 숨길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즉, 주님은 제자들이 묻던 ‘안전한 장소’의 개념을 완전히 지워버리시고, 하나님 심판의 ‘확실성과 불가피성’을 엄중하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썩은 시체가 있으면 독수리가 반드시 임하듯, 죄로 오염된 이 세상과 영혼 위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예외 없이, 반드시, 그리고 철저히 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7장에서 세 차례 말세에 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핵심은 인자의 날이 얼마나 갑작스럽게 임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인간이 예측하거나 준비할 수 있는 시간표에 맞춰 오지 않습니다. 밤에 잠을 자다가, 낮에 평범하게 일을 하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 도둑같이 임합니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기한에, 그분의 주권적인 의지로 온 세상을 순식간에 심판하시고 구원을 집행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하늘에서 먹이를 향해 순식간에 내려오듯, 인자의 날은 온 인류가 평범한 일상에 취해 있을 때 불현듯 임하여 모든 것을 갈라놓을 것입니다.
종교의 울타리 안에 있다고 해서, 예배당 의자에 앉아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시체가 독수리를 필연적으로 끌어당기듯, 주님 없이 영혼이 부패하고 말라비틀어져 있다면 그 어디라도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어디로 피해야 심판을 면할까’ 하는 인간적인 계산을 내려놓고, 인자의 날이 가진 그 압도적인 돌연성과 심판의 불가피성을 기억하며, 매일의 일상 속에서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고 강력히 촉구하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고, ‘도둑같이 오신다’는 이 말씀이 혹시 마음에 큰 부담이나 두려움으로 다가오지는 않으십니까? “내가 나이 들어 몸도 아프고 기도도 오래 못 하는데, 주님 오실 때 졸고 있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시는 어르신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을 이제 막 시작해서 “나는 아직 성경도 잘 모르고 믿음도 연약한 초신자인데, 주님이 갑자기 오셔서 나를 두고 가시면 어쩌나” 불안해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 불안,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위로가 되는 영적인 비밀을 들려줍니다. 주님의 재림이 ‘도둑같이’ 임하여 무서운 심판이 되는 대상은, 이 땅의 삶이 전부인 줄 알고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살전 5:5)
우리 어르신들, 예전에 시골 사실 때 새벽이나 밤중에 밭에 나가보신 적 있으시지요?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우면 발걸음 하나 떼기가 참 무섭고 조심스럽습니다. 돌부리에 걸릴까, 구덩이에 빠질까 불안합니다. 하지만 아침 해가 환하게 떠오른 ‘낮’에는 어떻습니까? 걱정 하나 없이 당당하고 편안하게 길을 걷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우리는 이미 ‘낮의 아들들’, 즉 빛 가운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주님을 생각하며 한 걸음씩 걸어가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오심은 밤중에 불쑥 들이닥치는 도둑처럼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 드디어 주님이 오시는구나!” 하고 기쁘게 맞이하는 감격의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주님, 오늘도 주님 손 꼭 잡고 살겠습니다” 고백하며, 기도하며 영적으로 늘 깨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지워지지 않는 염려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깨어 있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내 삶을 돌아보면 날마다 넘어지고 실수하기 바쁜데… 주님 보시기에 내가 정말 ‘빛의 아들’이 맞을까?”하는 의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내 믿음은 너무 작고 초라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오늘 설교의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선언인 세 번째 대지 ‘복음의 약속’ 앞에 서게 됩니다. 마지막 날 우리를 구원하는 결정적인 비밀은 나의 완벽함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복음의 약속
사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검열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의심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꼭 기억하십시오. 마지막 날 우리를 갈라놓는 것은 우리의 완벽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입니다. 의외로 많은 분들이 구원의 기준이 내면의 완벽함이나 높은 도덕성에 있다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사탄이 찾아와 “네 꼴을 봐라. 어제도 화내고 오늘도 짜증 냈으면서 네가 진짜 구원받은 성도가 맞냐?”라고 고소할 때, 절망의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우리를 이 절망에서 건져내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아침과 저녁이 다르고, 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진흙탕 같습니다. 그런데 내 믿음이 비록 겨자씨만큼 작고 보잘것없을지라도, 내가 붙들고 있는 그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면 우리의 구원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구원은 내 결백함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의지할 때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목자가 진흙탕에 뒹굴어 털이 뭉치고, 상처 입은, 더러운 양 한 마리를 정성스럽게 돌보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묻습니다. “저렇게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양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그때 목자가 양의 귀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양이 진흙투성이가 된 건 상관없습니다. 보십시오, 이 양의 귀에 표시된 것은 내 소유라는 뜻입니다. 내 양이기에, 나는 끝까지 책임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매일 세상의 진흙탕 속에서 넘어지고, 때 묻은 양 같을지라도 상관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아들의 피로 우리의 영혼에 “너는 내 것이다”라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새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피의 언약은 영원히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원의 확신이 우리 삶을 방종으로 이끕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복음은 반드시 우리를 거룩한 변화인 ‘성화’로 이끌어갑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분께 속한 사람은, 여전히 넘어질지라도 결코 옛 삶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우선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탄식하시기에 죄에 대해 마음 아파합니다. 거칠었던 입술에 친절함이 묻어나고,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었던 마음에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싹틉니다. 교회와 이웃을 섬기게 됩니다. 이제 매일의 삶이 주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통로가 됩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의 영혼을 붙들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두려움이 아니라 복음이 주는 당당한 확신을 가지고 예배당 문을 나서십시오.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의 연약함을 고소하며 구원의 확신을 흔들려 하지만, 우리의 구원은 나의 완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몰라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확실한 복음의 약속을 믿는 성도라면, 설령 주님이 내일 오시더라도 오늘 나에게 맡겨진 평범한 일상을 가장 성실하게 살아내면 됩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분별할 수 없는 그 칠흑 같은 밤과 분주한 낮의 한복판에서, 주님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기 백성을 구별해 내실 것입니다. 침대 위에서, 모니터 앞에서, 우리를 정확하게 찾아내어 데려가실 것입니다.
바로 그날에 여러분은 “아, 드디어 무서운 심판이 시작되는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그 순간, 우리의 입술에서는 이런 고백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아… 드디어 집에 돌아왔구나.”
멀리 외국의 낯선 땅으로 유학을 떠났던 어린아이가 오랜 시간 외로움과 고단함을 견디다가, 마침내 귀국하여 공항 입국장을 걸어 나온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저 멀리서 자신을 기다리며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부모를 발견하는 순간, 그 아이는 엄격한 재판이나 심판을 느끼지 않습니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이제 살았다, 드디어 집에 돌아왔구나!’ 하는 안도감과 기쁨에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님의 재림은 무서운 재판장이 나를 벌하러 오는 무서운 날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손해 보고, 외로운 나그네로 살며, 눈물 흘리고 지친 나를...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마침내 안아주시는 날입니다. 공항 입국장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두 팔을 벌릴 때, 그 아이의 온몸에 긴장이 풀리며 눈물이 터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날, 우리의 깨어지고 상처 입은 온 삶은 마침내 온전해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집으로의 초대입니다. 이 눈부신 복음의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그리운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처럼 설렘과 평안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날짜: 2026년 6월 21일
본문: 누가복음 17:34-37
제목: 같은 일상, 다른 운명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성도 여러분, 오랜 세월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해왔는데도 문득문득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지 않으십니까? 교회에서는 세상 둘도 없는 천사 같은 목사와 성도인데, 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사소한 일에 벌컥 화를 냅니다. 일터에서 잔뜩 얻은 스트레스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내 아내에게, 내 남편에게, 내 자녀들에게 짜증으로 쏟아내고 마는 내 못난 모습을 봅니다. 주일에는 거룩하게 예배드리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돈에 매달리고, 아등바등 집착하며 살아갑니다. 그 위선적인 내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에 차가운 질문이 던져집니다.”너 진짜 예수 믿는 사람 맞니? 너 그러고도 정말 구원받은 성도 맞니?” 예수를 믿는데도 내 인생에 아무런 영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 속에 감추어진 놀라운 반전이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여러 교인들이 오랜만에 고국을 방문해,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옛 친구를 만났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아주 세련되고 여유롭게 사는 친구 앞에 앉아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위축되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아, 나는 그동안 뭘 하고 살았나…’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똑같은 교실에서 공부했고, 똑같은 추억을 나눈 단짝이었는데 말입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니까 그 친구는 인생의 ‘주인공’ 같고, 나는 초라한 ‘엑스트라’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대화가 점점 깊어지면서, 마음에 전혀 다른 차원의 깨달음과 신선한 충격이 옵니다. 바로 평생 하나님 없이 살아온 친구의 숨은 뒷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돈과 성공,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친구의 화려함 뒤에는, 채워지지 않는 지독한 허무와 영적인 어둠이 감춰져 있었습니다. 반면에 비록 매일 넘어지고 여전히 부족할지라도, 내 안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있습니다. 영원을 바라보는 소망이 있습니다. 삶의 가치관과 목적이 완전히 달라져 있는 내 자신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영원의 렌즈를 끼고 다시 내 인생을 바라보게 됩니다. 겉보기에는 친구가 주인공 같고 내가 엑스트라 같았는데, 실상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복음이 우리의 운명을 이미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아, 우리는 매일 똑같은 해를 보고 똑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걷고 있는 길은 완전히 다르구나!’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의 짧은 인생도 겉모습과 실상의 길이 이렇게 갈라지는데, 하물며 마지막 날 ‘영원’ 앞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일어날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겉으로는 구별이 되지 않으나, 실상은 완전히 분리되는 최종적인 심판입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 하나님께서 마침내 영원한 갈래 길을 펼치십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완벽하게 똑같아 보이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평범한 삶의 한복판에서, 그들의 운명은 영원히 갈라지게 됩니다. 바로, ‘같은 일상’을 살았으나 ‘다른 운명’을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오늘 밤 주님이 오신다면, 매일 아침 같은 밥상에 앉던 우리 가족은, 매주 같은 자리에서 찬양하던 우리 교인들은 다 함께 그 나라에 올라갈 수 있을까요? 성경은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겉보기엔 똑같아 보일지라도, 그 운명은 영원히 갈라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과연 이들의 운명을 무엇이 갈라놓았는지 말씀해 줍니다. 본문 34절과 35절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둘이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눅 17:34–35)
1. 하나님만 아시는 결정적 차이
여기서 우리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똑같은 여건에서 똑같이 일을 하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는가? 무엇이 이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는가?”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겉으로는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밤에 한 침대에 누워 있는 부부나 가족, 낮에 일터에서 함께 맷돌을 갈고 있는 동료들—이들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완벽하게 동일한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우리는 누가복음 전체를 연결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전체를 따라가 보면, 예수님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자기 나라 사이의 갈림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을 쌓아두며 “내 영혼아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자” 했던 어리석은 부자의 비극을 기억하십니까? 큰 잔치에 초대받았으나 밭을 샀고 소를 시험해야 하며 장가를 들어서 잔치에 갈 수 없다고 했던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겉으로는 성실한 일상생활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초청과 통치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왕국을 견고히 세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중심’의 문제입니다. “지금 현재, 내 삶의 중심에 누가 앉아 계시는가”이것이 문제입니다.
같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지만, 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다스림을 구하며 눈을 감고, 다른 한 사람은 오직 자신의 안위와 자기 왕국을 확장할 생각으로 밤을 맞이합니다.
같은 직장에서 함께 일하지만, 한 사람은 이 일터를 하나님이 보내신 사명의 자리로 여기며 그리스도의 대사로 살아가고, 다른 한 사람은 그저 돈과 성공이라는 세상 나라의 법을 따르며 살아갑니다.
심지어 같은 예배당 의자에 앉아 예배를 드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오직 주님의 통치 앞에 무릎을 꿇지만, 다른 한 사람은 익숙한 종교적 루틴에 만족하며 자기 인생의 중심에 여전히 자신이 왕이 되어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 재림 때 들림과 버림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완전히 새로운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 이 땅에서 누구의 다스림을 받으며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 살았는지, 이것이 마지막 날 숨김없이 다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평소에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다스림을 기뻐하던 자들은, 주님이 오시는 그날 자연스럽게 그 영광의 나라로 데려감을 당할 것입니다. 반면에 평생 자기가 왕이 되어 오직 자기 자신의 배만을 위해 살던 자들은 그대로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 이 최종적인 분리는 겉으로는 동일한 일상을 살아가지만 이미 우리 중심에서 결정됩니다.
2. 주검이 있는 곳에 모이는 독수리
주님의 이 엄중한 분리의 말씀을 듣자 제자들은 큰 충격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물었습니다. “주님, 어디오니이까? 이 무서운 분리와 심판이 도대체 어디서 일어나는 것입니까?”
제자들은 심판이 임하는 특별한 ‘장소’가 따로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타락한 이방 도시나 로마의 궁궐 같은 곳에 심판이 임할 것이고, 자신들이 서 있는 유대의 성전이나 종교적 울타리 안은 안전지대일 것이라 확신했을지 모릅니다. 즉 “어디로 피해야 안전합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은, 바로 그 안전지대를 확인하고 싶었던 종교적 본능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이 가진 고정관념을 단숨에 깨부수는 충격적인 이미지 하나로 답하십니다. 37절 후반절입니다. “이르시되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눅 17:37)
이 말씀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쓰이던 속담이었습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의도가 무엇일까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 떼가 순식간에 하늘에서 내리앉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칙입니다. 숨길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즉, 주님은 제자들이 묻던 ‘안전한 장소’의 개념을 완전히 지워버리시고, 하나님 심판의 ‘확실성과 불가피성’을 엄중하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썩은 시체가 있으면 독수리가 반드시 임하듯, 죄로 오염된 이 세상과 영혼 위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예외 없이, 반드시, 그리고 철저히 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7장에서 세 차례 말세에 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핵심은 인자의 날이 얼마나 갑작스럽게 임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인간이 예측하거나 준비할 수 있는 시간표에 맞춰 오지 않습니다. 밤에 잠을 자다가, 낮에 평범하게 일을 하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 도둑같이 임합니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기한에, 그분의 주권적인 의지로 온 세상을 순식간에 심판하시고 구원을 집행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하늘에서 먹이를 향해 순식간에 내려오듯, 인자의 날은 온 인류가 평범한 일상에 취해 있을 때 불현듯 임하여 모든 것을 갈라놓을 것입니다.
종교의 울타리 안에 있다고 해서, 예배당 의자에 앉아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시체가 독수리를 필연적으로 끌어당기듯, 주님 없이 영혼이 부패하고 말라비틀어져 있다면 그 어디라도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어디로 피해야 심판을 면할까’ 하는 인간적인 계산을 내려놓고, 인자의 날이 가진 그 압도적인 돌연성과 심판의 불가피성을 기억하며, 매일의 일상 속에서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고 강력히 촉구하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고, ‘도둑같이 오신다’는 이 말씀이 혹시 마음에 큰 부담이나 두려움으로 다가오지는 않으십니까? “내가 나이 들어 몸도 아프고 기도도 오래 못 하는데, 주님 오실 때 졸고 있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시는 어르신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을 이제 막 시작해서 “나는 아직 성경도 잘 모르고 믿음도 연약한 초신자인데, 주님이 갑자기 오셔서 나를 두고 가시면 어쩌나” 불안해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 불안,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위로가 되는 영적인 비밀을 들려줍니다. 주님의 재림이 ‘도둑같이’ 임하여 무서운 심판이 되는 대상은, 이 땅의 삶이 전부인 줄 알고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살전 5:5)
우리 어르신들, 예전에 시골 사실 때 새벽이나 밤중에 밭에 나가보신 적 있으시지요?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우면 발걸음 하나 떼기가 참 무섭고 조심스럽습니다. 돌부리에 걸릴까, 구덩이에 빠질까 불안합니다. 하지만 아침 해가 환하게 떠오른 ‘낮’에는 어떻습니까? 걱정 하나 없이 당당하고 편안하게 길을 걷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우리는 이미 ‘낮의 아들들’, 즉 빛 가운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주님을 생각하며 한 걸음씩 걸어가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오심은 밤중에 불쑥 들이닥치는 도둑처럼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 드디어 주님이 오시는구나!” 하고 기쁘게 맞이하는 감격의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주님, 오늘도 주님 손 꼭 잡고 살겠습니다” 고백하며, 기도하며 영적으로 늘 깨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지워지지 않는 염려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깨어 있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내 삶을 돌아보면 날마다 넘어지고 실수하기 바쁜데… 주님 보시기에 내가 정말 ‘빛의 아들’이 맞을까?”하는 의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내 믿음은 너무 작고 초라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오늘 설교의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선언인 세 번째 대지 ‘복음의 약속’ 앞에 서게 됩니다. 마지막 날 우리를 구원하는 결정적인 비밀은 나의 완벽함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복음의 약속
사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검열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의심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꼭 기억하십시오. 마지막 날 우리를 갈라놓는 것은 우리의 완벽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입니다. 의외로 많은 분들이 구원의 기준이 내면의 완벽함이나 높은 도덕성에 있다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사탄이 찾아와 “네 꼴을 봐라. 어제도 화내고 오늘도 짜증 냈으면서 네가 진짜 구원받은 성도가 맞냐?”라고 고소할 때, 절망의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우리를 이 절망에서 건져내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아침과 저녁이 다르고, 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진흙탕 같습니다. 그런데 내 믿음이 비록 겨자씨만큼 작고 보잘것없을지라도, 내가 붙들고 있는 그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면 우리의 구원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구원은 내 결백함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의지할 때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목자가 진흙탕에 뒹굴어 털이 뭉치고, 상처 입은, 더러운 양 한 마리를 정성스럽게 돌보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묻습니다. “저렇게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양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그때 목자가 양의 귀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양이 진흙투성이가 된 건 상관없습니다. 보십시오, 이 양의 귀에 표시된 것은 내 소유라는 뜻입니다. 내 양이기에, 나는 끝까지 책임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매일 세상의 진흙탕 속에서 넘어지고, 때 묻은 양 같을지라도 상관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아들의 피로 우리의 영혼에 “너는 내 것이다”라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새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피의 언약은 영원히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원의 확신이 우리 삶을 방종으로 이끕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복음은 반드시 우리를 거룩한 변화인 ‘성화’로 이끌어갑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분께 속한 사람은, 여전히 넘어질지라도 결코 옛 삶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우선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탄식하시기에 죄에 대해 마음 아파합니다. 거칠었던 입술에 친절함이 묻어나고,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었던 마음에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싹틉니다. 교회와 이웃을 섬기게 됩니다. 이제 매일의 삶이 주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통로가 됩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의 영혼을 붙들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두려움이 아니라 복음이 주는 당당한 확신을 가지고 예배당 문을 나서십시오.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의 연약함을 고소하며 구원의 확신을 흔들려 하지만, 우리의 구원은 나의 완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몰라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확실한 복음의 약속을 믿는 성도라면, 설령 주님이 내일 오시더라도 오늘 나에게 맡겨진 평범한 일상을 가장 성실하게 살아내면 됩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분별할 수 없는 그 칠흑 같은 밤과 분주한 낮의 한복판에서, 주님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기 백성을 구별해 내실 것입니다. 침대 위에서, 모니터 앞에서, 우리를 정확하게 찾아내어 데려가실 것입니다.
바로 그날에 여러분은 “아, 드디어 무서운 심판이 시작되는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그 순간, 우리의 입술에서는 이런 고백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아… 드디어 집에 돌아왔구나.”
멀리 외국의 낯선 땅으로 유학을 떠났던 어린아이가 오랜 시간 외로움과 고단함을 견디다가, 마침내 귀국하여 공항 입국장을 걸어 나온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저 멀리서 자신을 기다리며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부모를 발견하는 순간, 그 아이는 엄격한 재판이나 심판을 느끼지 않습니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이제 살았다, 드디어 집에 돌아왔구나!’ 하는 안도감과 기쁨에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님의 재림은 무서운 재판장이 나를 벌하러 오는 무서운 날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손해 보고, 외로운 나그네로 살며, 눈물 흘리고 지친 나를...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마침내 안아주시는 날입니다. 공항 입국장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두 팔을 벌릴 때, 그 아이의 온몸에 긴장이 풀리며 눈물이 터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날, 우리의 깨어지고 상처 입은 온 삶은 마침내 온전해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집으로의 초대입니다. 이 눈부신 복음의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그리운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처럼 설렘과 평안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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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OWUdZueBd9U 26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