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당신을 춤추게 합니까? (11.30.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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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41회 작성일 Dec 01 2025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11월 30일
본문: 하박국 3:16-19
제목: 무엇이 당신을 춤추게 합니까?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우리 인생에는 춤을 추고 싶을 만큼 기쁜 순간들이 있습니다. 승진 소식을 들었을 때, 자녀나 손주가 시험에 합격했을 때, 혹은 오랫동안 기도하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우리는 저절로 어깨가 들썩입니다. ‘춤을 출 듯이 기쁘다’는 말은 이럴 때 씁니다.
하지만 반대로, 삶의 기반이 송두째 무너지는 절망의 순간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전에 기독교 신앙에 대해 가장 널리 퍼진 오해가 있었습니다. 바로 마르크스가 말했던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말은 “신앙이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고, 문제를 직면하지 못하도록 잠시 무감각하게 만드는 마취제나 진통제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현실에서는 해결할 수 없으니 하늘만 바라봐라”고 말하는 듯한, 무기력함의 표징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현실을 ‘마비’시키는 아편이 아니라, 가장 참혹한 현실을 두 발로 딛고 일어서게 하는 '근력'과 '용기'를 줍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를 현실 도피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절망적이고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위에 계신 하나님을 선명하게 보게 하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줍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땅을 박차고 일어설 수 있게 하는 폭발적인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 하박국 3장에서 이 능력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놀라운 고백을 듣게 됩니다. 하박국은 지금 역사의 가장 어두운 순간, 곧 나라가 무너지고, 삶의 기반이 모두 사라지고, 내일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극한의 절망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는 몸이 떨리고 뼈가 썩는 것 같다고, 그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며 직면합니다(3:16). 그런데 그 절망의 자리에서 그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듯한 하나의 질문이자 고백을 선언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3:17-18)
이 고백이야말로 성경적 신앙이 환경을 초월하는 강력한 능력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기도가 응답 되고, 상황이 좋아져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도 오직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며 춤출 수 있는 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박국처럼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 어떻게 ‘여호와로 인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시는 힘’이 되어 ‘절망의 산 위에서 춤추게 하시는지’를 함께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1. 우리네 삶의 고단함과 영적 공허
하박국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의 현실을 돌아봅시다. 미국은 본래 ‘꿈’이라는 원동력으로 달리는 거대한 기관차와 같은 나라입니다. 이민자들이 건너온 이 새 대륙은 이전 대륙과는 달랐습니다. 더 이상 사회적 신분과 지위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능력과 성취에 따라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재능에 따라 꿈을 성취할 수 있는 공평한 기회가 돌아가는 사회입니다. 이를 위해 차별이 없는 않는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아메리칸 드림’이었습니다. 미국은 이러한 간절한 꿈이 살아 있을 때 성장하였고 발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현주소는 어떻습니까? 2008년 경제 위기, 팬데믹 이후의 고물가와 고금리, 극심한 사회적 분열은 우리가 믿었던 ‘안정’이 얼마나 허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지난주에 있었던 백악관 앞에서 총기사건은 마치 찬란했던 꿈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그동안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셨습니까? 자녀들을 제대로 돌볼 겨를도 없이, 내 건강 하나 챙겨 볼 여유도 없이,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돌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오직 이 땅에서 자리 잡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분투해 오셨습니까?
그 결과, 무엇인가를 손에 넣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자식들이 잘 컸고, 평생 벌어 놓은 것으로 노후 걱정이 없으며, 소위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하는 큰 집, 고급 차, 값비싼 가전제품, 고가의 장신구, 화려한 휴가를 즐기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한동안 무엇인가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닥친 불황으로 인해 다 놓쳐 버린 분도 계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아메리칸 드림이 마치 신기루 같아서, 아무리 잡으려 해도 손을 펴 보면 빈손만을 확인하며 긴 한숨을 짓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아메리칸 드림을 순전히 세속적이고 탐욕적인 욕망으로만 해석하게 된다면,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탐욕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그 끝은 허탈과 절망뿐입니다. 설령 꿈을 이뤘다 해도 물질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교만에 빠질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실패한 인생이라는 패배감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에 최소한의 물질,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누울 곳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영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충만해지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만족과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비록 물질적인 번영을 이루었더라도, 여전히 내 안의 텅 빈 마음을 채울 수 없어 실망감과 허탈감이 밀려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겪고 있는 경기 불황과 삶의 시련 앞에서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혹시 물질적인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환상에 매몰되어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실상 마음은 세상에 팔지 않았는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의 부르심을 외면하고서 물질의 번영만을 목표로 살지는 않았는지 신앙인으로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입니다.
2. 하박국이 마주한 절망의 현실과 인간적 떨림
오늘 본문의 하박국 선지자가 살던 시대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더 처참했습니다. 하박국 1장을 살펴보면 그는 불의한 세상을 보고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합 1:2-4)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하박국은 답답했습니다. “하나님, 살아계신다면 왜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들의 폭력을 당하도록 놓아두십니까?”
그런데 돌아온 하나님의 응답은 아주 충격적입니다. “내가 갈대아(바벨론) 사람을 일으켜 너희를 심판하겠다.”
하박국은 “하나님, 이 땅의 불의를 고쳐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정의로운 개혁을 원합니다. 그런데 돌아온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네가 지금까지 본 악인들보다 더 흉악하고 포악한 자들이 와서, 너희의 재물을 빼앗고 예루살렘을 쑥밭으로 만들 것이다”라는 청천벽력 같은 예고입니다. 내 생각, 내 계획, 내 기대를 완전히 산산조각 내시는 응답입니다
이 엄청난 환란의 소식을 듣고 하박국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합 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박국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전쟁과 심판이 먹구름처럼 몰려오는 것을 보고 나뭇잎처럼 떨었습니다. “임박한 이 환란을 우리 민족이, 내 가족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압도적인 공포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떠는 하박국을 두고 “믿음이 부족하다”고 속단해서는 안 됩니다. 암 진단 앞에서, 부도 위기 앞에서, 자녀의 고통 앞에서 우리도 떨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육신의 연약함에서 오는 것이지, 믿음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도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늘상 사단은 우리의 연약함을 빌미로 우리를 정죄하려 들지만,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도 다 그랬습니다.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한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감옥에 갇히자 마음이 약해져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고 의심하며 물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7장 5절에서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두려움 그 자체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그 떨림의 순간에도 무엇을 선택하느냐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는 춤
이럴 경우에 사람들은 보통 세 가지로 반응합니다.
첫째, 체념입니다. “다 엎질러진 물이야, 내 팔자가 그렇지 뭐” 하며 주저앉습니다.
둘째, 도피입니다. 괴로우니까 술이나 쾌락에 자신을 맡겨 버리고, 될 수 있는 한 현실을 잊으려고 합니다.
셋째, 인본주의적 용기입니다. 이를 악물고 “나는 할 수 있다”며 깡으로 버티는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 세 번째 태도가 가상해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용기와 의지만으로는 흔들리는 창자와 떨리는 입술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체념이나 도피, 그리고 인간적인 용기에 호소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약함을 정직히 인정하게 합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제4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7-18절이 그 답입니다. (합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통장의 잔고가 비어가고, 사업이 무너지고, 건강이 약해져도... 내 인생의 ‘무화과’와 ‘포도’가 다 사라져 버린 그 빈들에서, 나는 하나님 한 분 때문에 춤을 추겠습니다!”
이것은 신앙인들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비록 육체는 두려워 떨고 있지만, 영혼은 환란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최악의 환경에서도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쓰인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로다’라는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는 단순히 미소 짓는 정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빙글빙글 돌며 춤추다’, ‘격렬하게 환호하며 뛰놀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멸망의 소식을 듣고 춤을 출 수 있습니까? 미쳐서가 아닙니다. 기쁨의 ‘원천’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풍성한‘무화과’ 결실 때문에, ‘포도’ 열매 때문에, ‘외양간의 소’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어야 웃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모든 조건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박국은 진짜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변하지 않는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감옥 속에서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고 고백한 그 능력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버림받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억울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행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살전 1:6)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래서 세상은 이들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는(고후 4:8)” 존재,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맺습니다.
불확실과 불황의 시대, 모두가 한숨 쉬는 이때에 세상은 누구를 주목하겠습니까? 똑같이 한숨 쉬고 염려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너진 현실 위에서도 평강을 누리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춤추는 그리스도인을 주목할 것입니다. 그리고 물을 것입니다.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믿기에 이 상황에서도 노래할 수 있습니까?”
물론 예수 믿는다고 고난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세상이 모르는 비밀 병기가 있습니다. 1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나님은 문제를 없애주시는 대신, 우리에게 그 문제를 가볍게 뛰어넘을 ‘사슴의 발’을 주십니다. 사슴은 험한 바위와 가시덤불 위를 아주 가볍고 경쾌하게 뛰어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실 때, 우리는 수렁에 빠지지 않고 문제를 밟고 높은 곳으로 다니는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시요, 우주 만물의 주가 되시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앞에 강이 범람하여 물이 덮치고, 불길이 쏟아진다고 할지라도, 인플레이션이 덮치고 아메리칸 드림이 무너진다고 할지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내 인생의 방향을 잡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 이것이 의인의 삶입니다.
하박국 2장 4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잃어버린 것들을 세어보며 한숨 짓는 대신, 결단합시다. “하나님, 내 손에 쥔 것이 없어도 좋습니다.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나는 오직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주님이 나의 노래가 되시고, 이 절망의 산 위에서 추는 나의 춤이 되어 주시옵소서.”
이 절대적인 감사의 고백이 여러분의 삶을 한층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주는 능력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날짜: 2025년 11월 30일
본문: 하박국 3:16-19
제목: 무엇이 당신을 춤추게 합니까?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우리 인생에는 춤을 추고 싶을 만큼 기쁜 순간들이 있습니다. 승진 소식을 들었을 때, 자녀나 손주가 시험에 합격했을 때, 혹은 오랫동안 기도하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우리는 저절로 어깨가 들썩입니다. ‘춤을 출 듯이 기쁘다’는 말은 이럴 때 씁니다.
하지만 반대로, 삶의 기반이 송두째 무너지는 절망의 순간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전에 기독교 신앙에 대해 가장 널리 퍼진 오해가 있었습니다. 바로 마르크스가 말했던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말은 “신앙이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고, 문제를 직면하지 못하도록 잠시 무감각하게 만드는 마취제나 진통제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현실에서는 해결할 수 없으니 하늘만 바라봐라”고 말하는 듯한, 무기력함의 표징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현실을 ‘마비’시키는 아편이 아니라, 가장 참혹한 현실을 두 발로 딛고 일어서게 하는 '근력'과 '용기'를 줍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를 현실 도피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절망적이고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위에 계신 하나님을 선명하게 보게 하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줍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땅을 박차고 일어설 수 있게 하는 폭발적인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 하박국 3장에서 이 능력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놀라운 고백을 듣게 됩니다. 하박국은 지금 역사의 가장 어두운 순간, 곧 나라가 무너지고, 삶의 기반이 모두 사라지고, 내일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극한의 절망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는 몸이 떨리고 뼈가 썩는 것 같다고, 그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며 직면합니다(3:16). 그런데 그 절망의 자리에서 그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듯한 하나의 질문이자 고백을 선언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3:17-18)
이 고백이야말로 성경적 신앙이 환경을 초월하는 강력한 능력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기도가 응답 되고, 상황이 좋아져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도 오직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며 춤출 수 있는 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박국처럼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 어떻게 ‘여호와로 인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시는 힘’이 되어 ‘절망의 산 위에서 춤추게 하시는지’를 함께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1. 우리네 삶의 고단함과 영적 공허
하박국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의 현실을 돌아봅시다. 미국은 본래 ‘꿈’이라는 원동력으로 달리는 거대한 기관차와 같은 나라입니다. 이민자들이 건너온 이 새 대륙은 이전 대륙과는 달랐습니다. 더 이상 사회적 신분과 지위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능력과 성취에 따라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재능에 따라 꿈을 성취할 수 있는 공평한 기회가 돌아가는 사회입니다. 이를 위해 차별이 없는 않는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아메리칸 드림’이었습니다. 미국은 이러한 간절한 꿈이 살아 있을 때 성장하였고 발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현주소는 어떻습니까? 2008년 경제 위기, 팬데믹 이후의 고물가와 고금리, 극심한 사회적 분열은 우리가 믿었던 ‘안정’이 얼마나 허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지난주에 있었던 백악관 앞에서 총기사건은 마치 찬란했던 꿈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그동안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셨습니까? 자녀들을 제대로 돌볼 겨를도 없이, 내 건강 하나 챙겨 볼 여유도 없이,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돌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오직 이 땅에서 자리 잡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분투해 오셨습니까?
그 결과, 무엇인가를 손에 넣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자식들이 잘 컸고, 평생 벌어 놓은 것으로 노후 걱정이 없으며, 소위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하는 큰 집, 고급 차, 값비싼 가전제품, 고가의 장신구, 화려한 휴가를 즐기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한동안 무엇인가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닥친 불황으로 인해 다 놓쳐 버린 분도 계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아메리칸 드림이 마치 신기루 같아서, 아무리 잡으려 해도 손을 펴 보면 빈손만을 확인하며 긴 한숨을 짓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아메리칸 드림을 순전히 세속적이고 탐욕적인 욕망으로만 해석하게 된다면,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탐욕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그 끝은 허탈과 절망뿐입니다. 설령 꿈을 이뤘다 해도 물질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교만에 빠질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실패한 인생이라는 패배감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에 최소한의 물질,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누울 곳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영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충만해지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만족과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비록 물질적인 번영을 이루었더라도, 여전히 내 안의 텅 빈 마음을 채울 수 없어 실망감과 허탈감이 밀려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겪고 있는 경기 불황과 삶의 시련 앞에서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혹시 물질적인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환상에 매몰되어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실상 마음은 세상에 팔지 않았는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의 부르심을 외면하고서 물질의 번영만을 목표로 살지는 않았는지 신앙인으로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입니다.
2. 하박국이 마주한 절망의 현실과 인간적 떨림
오늘 본문의 하박국 선지자가 살던 시대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더 처참했습니다. 하박국 1장을 살펴보면 그는 불의한 세상을 보고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합 1:2-4)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하박국은 답답했습니다. “하나님, 살아계신다면 왜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들의 폭력을 당하도록 놓아두십니까?”
그런데 돌아온 하나님의 응답은 아주 충격적입니다. “내가 갈대아(바벨론) 사람을 일으켜 너희를 심판하겠다.”
하박국은 “하나님, 이 땅의 불의를 고쳐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정의로운 개혁을 원합니다. 그런데 돌아온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네가 지금까지 본 악인들보다 더 흉악하고 포악한 자들이 와서, 너희의 재물을 빼앗고 예루살렘을 쑥밭으로 만들 것이다”라는 청천벽력 같은 예고입니다. 내 생각, 내 계획, 내 기대를 완전히 산산조각 내시는 응답입니다
이 엄청난 환란의 소식을 듣고 하박국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합 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박국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전쟁과 심판이 먹구름처럼 몰려오는 것을 보고 나뭇잎처럼 떨었습니다. “임박한 이 환란을 우리 민족이, 내 가족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압도적인 공포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떠는 하박국을 두고 “믿음이 부족하다”고 속단해서는 안 됩니다. 암 진단 앞에서, 부도 위기 앞에서, 자녀의 고통 앞에서 우리도 떨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육신의 연약함에서 오는 것이지, 믿음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도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늘상 사단은 우리의 연약함을 빌미로 우리를 정죄하려 들지만,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도 다 그랬습니다.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한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감옥에 갇히자 마음이 약해져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고 의심하며 물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7장 5절에서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두려움 그 자체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그 떨림의 순간에도 무엇을 선택하느냐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는 춤
이럴 경우에 사람들은 보통 세 가지로 반응합니다.
첫째, 체념입니다. “다 엎질러진 물이야, 내 팔자가 그렇지 뭐” 하며 주저앉습니다.
둘째, 도피입니다. 괴로우니까 술이나 쾌락에 자신을 맡겨 버리고, 될 수 있는 한 현실을 잊으려고 합니다.
셋째, 인본주의적 용기입니다. 이를 악물고 “나는 할 수 있다”며 깡으로 버티는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 세 번째 태도가 가상해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용기와 의지만으로는 흔들리는 창자와 떨리는 입술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체념이나 도피, 그리고 인간적인 용기에 호소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약함을 정직히 인정하게 합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제4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7-18절이 그 답입니다. (합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통장의 잔고가 비어가고, 사업이 무너지고, 건강이 약해져도... 내 인생의 ‘무화과’와 ‘포도’가 다 사라져 버린 그 빈들에서, 나는 하나님 한 분 때문에 춤을 추겠습니다!”
이것은 신앙인들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비록 육체는 두려워 떨고 있지만, 영혼은 환란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최악의 환경에서도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쓰인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로다’라는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는 단순히 미소 짓는 정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빙글빙글 돌며 춤추다’, ‘격렬하게 환호하며 뛰놀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멸망의 소식을 듣고 춤을 출 수 있습니까? 미쳐서가 아닙니다. 기쁨의 ‘원천’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풍성한‘무화과’ 결실 때문에, ‘포도’ 열매 때문에, ‘외양간의 소’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어야 웃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모든 조건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박국은 진짜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변하지 않는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감옥 속에서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고 고백한 그 능력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버림받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억울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행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살전 1:6)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래서 세상은 이들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는(고후 4:8)” 존재,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맺습니다.
불확실과 불황의 시대, 모두가 한숨 쉬는 이때에 세상은 누구를 주목하겠습니까? 똑같이 한숨 쉬고 염려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너진 현실 위에서도 평강을 누리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춤추는 그리스도인을 주목할 것입니다. 그리고 물을 것입니다.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믿기에 이 상황에서도 노래할 수 있습니까?”
물론 예수 믿는다고 고난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세상이 모르는 비밀 병기가 있습니다. 1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나님은 문제를 없애주시는 대신, 우리에게 그 문제를 가볍게 뛰어넘을 ‘사슴의 발’을 주십니다. 사슴은 험한 바위와 가시덤불 위를 아주 가볍고 경쾌하게 뛰어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실 때, 우리는 수렁에 빠지지 않고 문제를 밟고 높은 곳으로 다니는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시요, 우주 만물의 주가 되시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앞에 강이 범람하여 물이 덮치고, 불길이 쏟아진다고 할지라도, 인플레이션이 덮치고 아메리칸 드림이 무너진다고 할지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내 인생의 방향을 잡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 이것이 의인의 삶입니다.
하박국 2장 4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잃어버린 것들을 세어보며 한숨 짓는 대신, 결단합시다. “하나님, 내 손에 쥔 것이 없어도 좋습니다.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나는 오직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주님이 나의 노래가 되시고, 이 절망의 산 위에서 추는 나의 춤이 되어 주시옵소서.”
이 절대적인 감사의 고백이 여러분의 삶을 한층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주는 능력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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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tzUJh9JHqmU 17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