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러 왔노라 (06.16.2024)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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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섬기러 왔노라 (06.16.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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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723회 작성일 Jun 17 2024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6월 16일
본문: 마가복음 10:35-45
제목: 섬기러 왔노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바로 섬김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출 3:12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 백성들의 삶을 한마디로 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려는데 애굽왕 바로가 애굽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자신을 섬기라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잡는 이유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서 애굽을 위한 노력 봉사하게 하고, 애굽의 대제국을 건설하는데 섬기라고 바로는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를 시켜서 바로와 싸움을 하게 되는 그 초점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유롭게 놓아줘라 왜냐하면 그들은 나를 섬겨야 되는 백성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를 섬겨야 되는 하나님 백성이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문제의 핵심을 놓고 바로와 모세가 실갱이 하는 몇 군데를 확인해 보도록 합시다.

(출 4: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출 7:16)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

이 본문에서 공통된 단어가 나오는 것을 유의해서 보세요. “섬기게 하라, 섬길 것이니라” 이스라엘의 출애굽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듭 이것을 밝힙니다. (출 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여러분, 세상과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큰 영적인 싸움의 실체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은 할 수만 있다면 최선을 다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뒷다리를 붙잡으려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큰 시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든지 세상의 죄악된 곳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려고 애쓰는 것이 신앙 생활의 모습이라고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생활을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물이 되어주신 이유는 더 이상 세상 종노릇을 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바치며 봉사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이런 종교의식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웃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지 말라. 고아와 과부를 돌봐줘라. 나그네와 노예들을 억압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우리가 전심전력으로 사랑해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어요? 이웃 사랑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의 정체성은 남을 섬기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섬기는 삶을 거절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 아들로서 인정 받고 대접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아지셨습니다. 영광의 보좌에서 이 땅으로 내려와 낮아지셨고, 거기서 더 내려가 섬기는 자리로 낮아지셨습니다. 거기서 또 내려가 십자가 죽음으로 섬기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섬김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에 예수님은 세 번째 수난에 대해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메시아가 이스라엘에게 황금기를 불러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에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고, 또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드디어 자신들이 고대하던 메시아의 영광이 도래할 줄로 알았습니다. 이런 와중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나아와 무엇을 해 주기를 구합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답합니다.

그들은 ‘주의 영광 중에서’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보좌에 앉으실 때 자기들을 총리와 장관으로 삼아달라는 부탁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의미한 요청입니다. 예수님이 취하실  영광의 자리는 세상 영광의 보좌가 아니라 십자가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주의 영광을 언제 분명히 드러내셨을까요? 바로 십자가 위에서 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을 맞이할 때 실제로 그분의 우편과 좌편에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아니라 십자가 처형을 당한 범죄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묻습니다. 38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은 실상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 줄을 알고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이냐?”예수님이 마실 잔과 받을 세례는 우리를 대신하여 받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무서운  형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할 수 있다”고 답변합니다. 고구마를 먹고 언친 것처럼 참으로 답답한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자들을 비웃기 보다는 우리 자신도 무엇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실 현대인들은 내면적 삶에 대해 관심이 거의 없습니다.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현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간구한다면 아마‘잘 살고 싶고, 건강하고, 날씬해지고 싶다’이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그들이 욕망하는 바는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부탁한 것과 같습니다. “부자가 되도록 해 주세요. 건강해서 오래 살게 해 주세요. 그리고 좀 더 날씬하게 해 주세요.”

현대인들은 성공의 사다리를 한 계단씩 올라가는 것이 잘 사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소유와 경쟁과 성취가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평가기준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대한 가치를 대단치 않게 여길 것입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이 구절에서 세속적 리더쉽을 상징하는 단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주관한다, 지배한다, 권세를 부린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떻게 다릅니까? 43절에 보세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는 달라야 한다. 너희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그 다음 44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세상 나라의 질서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오셨고 사셨고 죽으셨습니다. 45절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섬기러 왔노라’고 하십니다. 오로지 섬김을 위해 살 것이고 "대속물로 주려한다"는 말은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섬기려 왔고 섬기며 살고 희생의 대속물로 죽음으로써 섬겼습니다. 확실한 목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대로 사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이고, 이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세상 나라는 죄로 말미암아 피의 역사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며 호령하고, 약탈하고 지배하는 힘의 질서입니다. 여기에는 폭력, 미움, 증오, 불의와 부정, 그리고 온갖 악독이 역사합니다. 출구가 없는 절망입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새질서를 가져오기 위해서 피로써 속죄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빌 2:7).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이 땅에 세우는 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임하게 합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선지자는 새질서가 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사 65: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러분,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이 천국 질서에 따라 살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이를 이해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물어보세요.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들은 그게 온전한 정신으로 하는 말이냐고 할 것입니다. 내가 돈을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무시 당하지 않고 대접 받기 위함입니다. 남에게 부림을 받지 않고 남을 부리기 위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 질서를 뒤집어 살아야 한다고 한다면 이를 과연 받아드릴 수 있을까요? 그래서 천국 질서는 오직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들만이 수용할 수 있고,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1. 섬김의 장애물

그런데 섬김의 삶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중요하지만 그렇게 살기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기심과 경쟁심과 비교의식이라는 장애물 때문입니다.

  1) 이기심
신앙생활 자체에 가장 어려운 장애물은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입니다. 현대인은 너무 자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지난 40년대와 50년대에 ‘라이프’(생명)라는 종합잡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70년대에는 ‘피플’(사람들)이라는 잡지로 시야가 좁혀졌습니다. 그러다 ‘어스’(우리)라는 잡지가 나오면서 범위가 더 좁아지고 마침내 ‘셀프’(자아)라는 잡지가 나왔습니다.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현대인들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말세가 가까울 때는 자기만을 사랑하고, 돈과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보다 더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딤후 3:2). 섬기는 삶의 가장 큰 장애는 바로 이 이기심입니다.

  2) 경쟁심 (빌 2, 막 10)
섬기는 삶을 방해하는 두번째 요인은 경쟁심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자기들을 오른팔 왼팔로 써달라고 미리 부탁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41절을 보세요.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아주 분개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3 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보고 배웠습니다. 생생한 현장 교육을 받으면서 예수님의 인격과 말씀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본능 속에 감춰져 있던 속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남보다 더 앞서야겠다는 것입니다. 속마음은 그렇지만 차마 주님 앞에서 표현만을 못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남들보다 주님의 사랑을 더 받고 있다고 생각한 야고보와 요한이 선수를 친 것입니다. 남은 제자들은 ‘아차’ 싶었겠지요. 그리고 분했고 화가 났습니다.

자유민주사회에서 경쟁은 자연스럽게 받아드립니다. 그리고 일시적인 효과를 거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을 이기기 위해, 남 보란듯이 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봉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섬기는 삶은 본질상 경쟁심으로 되지 않습니다. 경쟁심은 결국 다툼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서로 경쟁하고 있는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한 마음을 품고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3) 비교의식 (요 24장)
이기심과 경쟁심이 섬기는 삶을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 드린다면 비교의식입니다.

디베랴 바닷가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세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주님을 세번 부인했던 베드로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다시 사명을 맡겨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어떻게 순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지 장차 일어날 일을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서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어리석은 말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요한을 가리키면서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하는 호기심 어린 질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항상 상대방을 의식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자신이 수제자인데 부활하신 주님이 여전히 자신을 특별 취급하고 계시는가에 대해 묻고 싶은 것입니다. ‘과연 주님이 여전히 나를 먼저 생각하시는가? 혹시 요한이 또다른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닌가?’하는 염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봉사하다가 불평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불평이 어디서 시작됩니까? 남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투덜댈만한 이런 저런 이유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우대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나은 조건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나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교회마저도 나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인정해 주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태도는 아주 단호하십니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요한을 살도록 할찌라도 이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네가 받은 사명에 충실하라. 이것입니다. 이렇게 비교의식이 우리의 섬김을 막습니다.

2. 섬기는 삶의 근거

그렇다면 우리속에 이렇게 비열한 이기심과 경쟁심과 비교의식으로 가득한데 어떻게 남을 섬기는 것이 가능합니까? 이런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십자가 때문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십자가입니다. 나의 옛성품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못박혔습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우리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이기심과 경쟁심, 비교의식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한번 못을 박아 버리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대못으로 나무에 못박아서 뜨거운 태양 아래서 굶주리고 목마름으로 서서히 말려 죽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기심과 경쟁심과 비교의식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리해 버립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주장하시기 때문에 (빌 2:4)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남을 섬길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3. 섬김의 자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주라고 신앙고백하고, 그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더욱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오랜 믿어온 만큼 더 예수님의 인격이 느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사람마다 성장과 성숙의 속도가 다르고, 그리고 각자 사연이 있기에 얼마만큼 변화 되었는지, 그 정도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이런 차이를 인정하고서도 기본적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흔적이 나타나야 하는데 간혹 당혹스러운 느낌이 들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바리새인의 모습을 더 닮아있다면 얼마나 황당한 일이겠습니까? 바리새인이 누구입니까? 주님을 대적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주님을 닮지 않고, 주님의 대적을 닮아간다고 한다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우리처럼 정통파 신앙인들입니다. 어쩌면 우리 보다 훨씬 더 신앙생활을 철저히 잘했던 것 같습니다. 더 엄격하게 종교 규율을 지켰습니다.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고, 음식도 구별해서 먹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섬김이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저희들 마음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저토록 열심히 신앙 생활했던 것은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과 의를 자랑하기 위함이었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자연히 이웃을 섬기고자 하는 열정도 동기도 없었습니다. 그 대신 정통파이고, 계율을 잘 지키는 나의 열심과 수고를 사람들이 인정해 주기 바랐습니다. 사람들이 박수쳐 주고 대접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없었기에 약한 자를 섬기기 위해 내려가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한 점은 우리의 신앙연륜이 더 해 갈 수록 주님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바리새인을 더 닮은 모습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어디서부터 잘못일까요? 어디서부터 꼬인 것일까요?

우리가 진정한 섬김의 길로 나아가려면 먼저 우리가 서야할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 1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예수님은 여기서 우리의 위치를 명확하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합니다.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합니다. 우리 상전이신 주님이 섬기셨습니다. 우리를 보내신 주님이 섬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위치에 서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섬기기 위해 대속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된 사람들은 자원해서 왕이신 그리스도를 섬기게 됩니다. 그것은 억지나 강제로 요구하는 섬김이 아닙니다. 받은 은혜와 사랑에 설복 되어 자발적으로 섬기는 섬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말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무엇이 최선의 것인지를 알고 계시며, 또 능히 이루어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요에 의해서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섬길지 또는 언제 섬길지 결정하는 주도권을 포기하고 그분께 맡겨드립니다.

이렇게 종의 정신으로 섬김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과 칭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섬김의 결과에 매이지 않습니다. 섬김 그 자체에서 만족과 기쁨을 얻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이 길은 주님이 가신 길이고, 주님이 인정하시는 길입니다. 이를 통과할 때에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고, 이어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내 본성은 대접 받기 원하고, 행세하기 원하고, 생색내기 원하고, 사람들에게 주목 받기 원합니다. 그런데 섬김의 자리에 내려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주가 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종입니다. 종이 주인보다 더 대접 받을 수 없습니다. (요 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우리의 진정한 신앙 싸움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진정 예수님을 좇아가는 제자가 되기 원하십니까? 섬김의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여러분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사람 또한 이웃을 섬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저 하늘 나라에서도 칭찬을 받고, 영광을 얻을 사람도 우리 가운데 작은 소자 하나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딤전 3:12을 보면 집사(섬기는 자)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를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저는 이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섬기는 자가 가장 아름다운 지위를 얻을 것입니다. 세상 역사도 이것을 말해 주지 않습니까? 죽은 후에도 길이 존경받는 인물들은 섬기며 살았던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사람은 결코 후회가 없습니다. 인내와 사랑과 희생으로써 남을 섬기는 사람에게 분명히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도 존귀와 영광이 있습니다. 주님을 본받아 자원하여서 섬기는 종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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