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04.07.2024)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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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04.07.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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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83회 작성일 Apr 08 2024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4월 7일
본문: 마가복음 5:35-43
제목: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현대인들은 과거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삽니다. 빨라지는 생활 속도, 뒤쳐질까봐 퇴근하지 못하는 일 중독 증세, 발달된 매스컴을 통한 생생한 현장보도로 불안감의 전염, 증가되는 전쟁의 위협(핵무기, 화학무기, 테러), 환경적 불안(인구문제, 재난, 오염), 감소되는 공동체 의식(잦은 이사, 무너지는 가족제도, 우정의 상실), 인간관계에 있어 잃어가는 신뢰심(믿음) 등 불안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에 둘러싸여있습니다. 지금 현대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로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성공해야만 인생을 성공한 것처럼 세상은 말합니다. 성공하지 못하면 마치 인생이 실패한 것처럼 되어 버렸어요. 성공주의에 사로잡혀 성공이 우상이 되어 버린 시대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성공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실 세상에서 성공이 인생의 전부가 아닌데도 오로지 성공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요. 성공에 대한 이런 집착 때문에 성공에 대한 강박증이 있고, 실패에 대한 공포심이 있어요.

둘째로, 사람들은 소외감과 죄책감 때문에 두려워해요. 사람들은 홀로 있기를 싫어해요. 하다못해 TV라도 켜놔야 안심이 됩니다. 그만큼 내적으로 허약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으로부터 따돌림을 받는데서 오는 소외감을 아주 힘들어합니다. 또 사랑하는 이와의 절교(단절, 이별)는 더욱 견디기 어렵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리시키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이를 격리시키는 특성이 있어요. 죄를 범한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이처럼 죄를 범한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죄책감으로 인해 두려워합니다. 이 죄책감이 우리를 두려움으로 속박해 버리는거에요. 그리고 관계 단절로 이어집니다.

셋째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요. 특히 코비드 이후로 불확실성이 커졌습니다. 그래서 확실치 않는 미래와 확실한 보장이 없는 내일을 대비해서 돈과 재물을 모읍니다. 그것으로 미래의 안전과 보장을 준비하는 거에요. 노후를 준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내일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안녕과 행복을 돈과 물질에 두는 것이 불신앙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노쇠하여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불의의 사고로 죽거나, 천재지변을 당해 죽거나, 어떤 모양으로든지 간에 죽음은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로 사망의 종노릇을 하는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받지 못하면 예외없이 죽음 앞에서 두려워서 벌벌 떱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이런 두려움이 비켜가지 않고 찾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 어떻게 믿음의 대처를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회당장 야이로가 두려움이 엄습하는 믿음의 시련을 겪습니다. 그에게 열두살 난 외동딸이 있었는데 중병으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예수께서 바닷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예수님을 찾아가 발 아래 엎드려 간절히 부탁하였습니다. 23절에 보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내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에 좀 와 주십시요. 안수를 해 주십시요. 구해 주십시오’ 외동딸이 죽어가는데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그래서 야이로가 주님께 많이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의 딸을 고칠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이 신유의 능력으로 거의 죽게 된 야이로의 딸을 안수하여 거뜬히 낫게 해 주었다는 또 하나의 치유기사가 아닙니다. 그보다 훨신 더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이라는 믿음의 시련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처음에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나아와 딸의 치유를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는 도중에 커다란 믿음의 시련이 밀어닥쳤습니다. 위기에 봉착한 회당장이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믿음을 지탱할 수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원리를 오늘 본문에서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주님을 믿지 않는다거나, 주님의 치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많이 기도하고 간구하면서도, 믿고 확신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위기를 당하면 두려워하고 당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과연 우리도 믿음의 시련을 만날 때 어떻게 흔들리지 않고, 여전히 견고히 서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 시련을 통해서 우리 믿음이 더욱 강해지고 튼튼해질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말씀을 듣는 이유입니다. 

1. 믿음의 말씀을 붙잡으라 (36절)

주님은 야이로의 많은 간구에 대해 거절치 않고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이것이 야이로에게 얼마나 안도와 위안이 되었을까요? 야이로의 마음에는 무한한 감사와 기쁨으로 흘러 넘쳤을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너무 행복하여 그동안 마음 졸이며 고생했던 것을 다 잊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 딸이 살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힘차게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중도에서 혈루병에 걸린 여인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이런 야이로의 기대감과 안도감이 일순간에 깨지고 말았습니다. 잘 가시던 예수께서 발걸음을 멈추신 것입니다. 지금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고 있는데, 한 시도 촉박한 상황인데 예수님은 한 여인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조급하고 답답하겠습니까?

이처럼 우리 인생길에서도 우리와 함께 가시던 주님이 때때로 길을 멈추십니다. 지금까지 잘 진행하는 것 같았고, 나도 잘 따라갔는데 그만 예수님이 가시던 길을 멈추는거에요. 예수께서 길을 멈추는 그 순간이 어쩌면 우리에게는 위기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해도 주님이 아무런 응답을 하시지 않는 것 같아요.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주님이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마음에 아무 감동이 없어요. 길이 보이지 않고 답답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한층 더 큰 믿음의 시련이 찾아옵니다. 35절에 보면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라는 말합니다. 즉 당신의 딸이 죽었으니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흔히 던지는 질문은 “왜?”입니다. ‘왜 주님은 잘 가시던 길을 멈추셨을까? 여인의 혈루병을 고쳐 주셨으면 빨리 떠나시지 왜 또 그 여인을 찾으시며 시간을 낭비하실까? 왜 좀 더 서둘러 가시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런 믿음의 시련이 우리를 한층 더 성숙시키고, 신앙의 뿌리를 더욱 깊어지도록 하는 하나님의 양육방법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왜”라고 질문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무엇”을 가르치시려고 하는지에 대해 알아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갖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믿음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믿음이 없이는 시험을 이길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세워 주시고, 굳세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사단은 자기 딸이 죽을까봐 바싹 조바심을 내고 있는 야이로에게 ‘딸이 죽었다’는 비보로써 야이로의 믿음을 박살을 내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사실 야이로가 와서 많이 간구할 때 예수님이 그냥 널널하게 아무 생각없이 따라 나선 것은 아닙니다. 이미 야이로의 믿음을 단련시키기 위하여 작정하시고 길을 나선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야이로의 처음 믿음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절박한 심정에서 나온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못했습니다.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붙잡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딸이 죽었다는 비보는 그 희미한 믿음마저도 산산조각이 되게 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절망 가운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그의 믿음을 붙잡아 주시며 세워 주십니다. 한 번 믿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두려워하지 않을 때까지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아무 것이라도 붙들고자 한 초보 믿음에서 벗어나, 이제는 두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믿음으로 서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가실 때에 그분의 생각과 계획은 즉흥적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믿음의 시련도 결코 즉흥적이지 않습니다. 치밀하게 우리의 믿음을 세워가시면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키십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16-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의 겉 사람은 쇠약해 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은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크고 엄청난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아침“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이 믿음의 말씀을 야이로가 붙잡았듯이 우리도 붙잡기를 축원합니다.

2. 소망의 말씀을 붙잡으라(39절)

우리가 믿음의 시련에 봉착하였을 때 하나님은 우리 눈을 열어 주셔서 새로운 관점에서 그 문제를 보게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점은 죽음을 절대적으로 봅니다. 죽은 뒤에는 아무 소용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중한 병이라도 살아 있을 때는 일말의 희망을 갖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체념하고 포기합니다.‘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지 않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아니겠는가? 이제 어떻게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절대적으로 받아드리고 체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세상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절대적으로 군림하지만, 만유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는 산 자나 죽은 자를 능히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저희에게 생명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를 내 손에서 빼았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영원히 멸망치 않습니다. 죽음의 권세일지라도 주님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손 안에 확고히 장악되어 있어서 절대적으로 보장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손에 붙잡혀 있어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이 있다면 죽음 가운데서도 소망을 갖습니다. 그것은 장차 영광 가운데 부활하여 주님과 영원히 함께 거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살전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다가 주께서 부르시는 날 그 영혼은 주께로 가고, 육신은 땅에 묻힙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마치 잠자다가 깨어나는 것처럼 마지막 나팔소리에 죽은 자들이 영광의 몸을 입고서 먼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던 자들도 홀연히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여 다시 오시는 주님을 환영하게 될 것입니다. 이후 다시는 죽음이 없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을 보여줍니다. 이 영원한 것을 본 자에게는 인생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생깁니다. 인생관이 바뀌고, 세계관이 바뀌고 사는 스타일과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러기에 똑같은 문제를 두고서 어제는 낙심 가운데서 절망하였지만 오늘은 새로운 시각에서 소망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우리도 이 소망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권능의 말씀을 붙잡으라(41-42절)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흙으로 빚어졌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흙에서 지음을 받았기에 믿음이 흔들리는 시점에 이르렀을 때 우리를 붙잡아 주시며 격려해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믿음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절망에서 소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달리다굼! 소녀야 내개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고 권능의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죽은 자나 산 자에게 똑같이 동일하게 명령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천지만물을 창조할 수 있는 권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이로의 딸은 방금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실 때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소녀야 일어나라, 달리다굼!’하고 말씀하시자 즉각 일어나 걸었습니다. 방금 죽은 소녀만을 살리신 것 아닙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은 지 수시간이 지났습니다. 당일에 시신을 묻는 그 당시 장례 풍습에 따라 지금 장례행렬이 진행중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관에 손을 대시며 “청년아 일어나라”고 말씀하실 때 그가 일어나 앉아 말을 했습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이미 시신이 부패되어 냄새가 진동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외치자 그가 무덤속에서 걸어나왔습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생사를 주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사도 요한은 주님의 영광을 보는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전에 사도 요한이 알던 분이 아니셨습니다. 영광스럽고, 엄위로우시고, 권세가 많으신 주님의 위용 앞에 사도 바울은 완전히 압도 당하였습니다. (계 1:14-16)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

17절을 보면 주님의 영광에 압도 된 사도 요한은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께서 오른손을 그에게 얹으시고 말씀하십니다. (계 1:17-18)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

여기서 “산 자” ‘Living One’이란 한 번 죽었다가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셔서 다시는 죽지 않고,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고, 다시는 죽지 않으실 것입니다. 부활의 승리로 인해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죽음이 가공할 만한 공포로 사람들을 이제껏 호령해 왔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벌벌 떨며 죽음의 종노릇을 해 왔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켜 버렸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순교의 위협을 받아도 두려워하지 않을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 권세자 로마황제보다, 죽음의 권세 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권세자들은 우리에게 육체의 죽음을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영과 육을 함께 멸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할 분을 두려워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세상은 불에 타 없어지며 멸망하겠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사람들은 엄위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짐을 받고 영원히 삽니다. 두려움을 이길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권능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홍해가 가로 막고 건너야 할 요단강이 범람하고 여리고성이 견고하지만, 홍해와 요단강을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졌던 것처럼 주님의 능력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에스골 골짜기에 마른 뼈가 널려져 있는데, 뼈들이 오래 되어서 햇빛에 하얗게 바짝 말라서 부셔지는 환상을 에스겔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현재 이스라엘의 영적 현실이었습니다. 한 톨의 소망조차 없습니다. 완전 절망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마른 뼈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말귀를 알아듣고 움직이는 것같습니다. 갑자기 우두둑 탁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하얀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됩니다. 이전에는 뼈들이 아무렇게나 너부러져 있었습니다. 사방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자 뼈들이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머리뼈에 목뼈가 붙습니다. 엉치뼈에 다리뼈가 붙습니다. 갈비뼈가 척추 뼈로 가서 붙습니다. 손가락 마디뼈들도 각기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갔습니다. 그위에 육체가 채워지고, 생기가 들어가자 지극히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에스겔 38장)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권능입니다. 

‘달리다쿰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씀에 즉각 소녀가 일어났던 것처럼 우리도 이 권능의 말씀을 힘입어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결론: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를 위기의 속으로 밀어 넣으시며 가던 길을 멈추십니다. 아직까지 그런 체험이 없다면 대비하십시오. 주님이 사랑하시는 백성에게는 반드시 광야의 시련이 있습니다. 광야의 뜨거운 동풍이 있고, 광야의 가뭄이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생수가 되시는 성령님을 갈구하게 됩니다. 그 시련의 위기는 우리의 작은 믿음과 확신의 밑바닥을 드러내놓는 시금석입니다. 이 시련 앞에서 내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얕고, 얼마나 쉽사리 흔들리기 쉬운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믿음의 시련으로 몰고 가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시련 속에서 생명되는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일어서게 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가시던 길을 멈춘다고 해서 그분이 우리를 버리신것은 아닙니다. 항상 우리 곁에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임재는 결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속 주님을 굳게 신뢰하고 믿음을 지켜 나가면 결국 내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시련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시고, 그 시련 끝에는 우리가 생각치 못할 축복을 준비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믿음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신 소망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달리다쿰 소녀야 일어나라’고 하신 권능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우리도 두려움이 사라지고, 확신 가운데 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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