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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11.05.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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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434회 작성일 Nov 06 2023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11월 5일
본문: 로마서 8: 31-34
제목: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설교자: 이강웅 목사

1966년 힌두교의 성자로 알려진 신비주의자 라오(Rao)는 물 위를 걷겠다고 널리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솔깃하여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 기적을 실행하겠다는 예정일이 되었습니다. 인도 봄베이에 있는 큰 못 주위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이 성자는 기도하면서 기적을 준비를 하고서 드디어 못가로 걸어나왔습니다. 운집한 사람들이 엄숙히 침묵을 하며 그를 지켜 보았습니다. 라오는 하늘을 홀깃 쳐다보고서 바로 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못 속으로 빠져 버렸습니다. 그는 물에 흠뻑 젖어서 못에서 나와 화를 내며 침을 튀기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불신자 한 사람이 있군요.”하고 화난 얼굴로 당황해 하는 무리를 향해 말했습니다. 마치 믿지 않는 한 사람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망 친 것처럼 핑계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당신의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중한 병도 고침 받을 것입니다. 당신은 승진할 것이고 가정은 행복할 것입니다.’고 열정적으로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그런데 ‘응답 받지 못했다고 하면 그건 당신 책임이다, 당신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라고 말을 바꿉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하다고 해서 우리의 구원에 탈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구원에는 우리의 믿음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우리 구원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작정된 뜻과 구원 행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우리 구원의 주체가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우리를 아셨고, 미리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 받도록 정하셨습니다.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셨습니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셨습니다.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고 분명합니다. 만약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변수가 많고 불안정하겠습니까? 당연히 우리의 구원도 불확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섭리하여 이루시니 우리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점은 사도 바울은 신학자가 아니라 목회자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는 기독교의 교리로 가득하지만 그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한 목적은 교리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의 믿음을 세워 주려 함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목회자이기에 교리가 단지 지식 전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되어서 저들로 하여금 올바르게 신앙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것을 확실히 못박아 놓겠다는 듯이 일련의 질문들을 던지며 확인합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완전한 계획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연약하고 무지합니다. 우리 자신을 살펴 볼 때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미리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결국 영화롭게 하시는 구원의 계획과 하나님의 하신 일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서 이렇게 묻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이 모든 게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이 하신 일이 이러합니다, 제가 더 할 말이 없네요.’ 이런 식으로 그냥 덤덤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의 놀라움에 압도되어 벅찬 감동으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뜨거운 마음으로 계속해서 질문합니다. 그 질문들이 오늘 아침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이 질문들을 숙고하면서 바울처럼 우리 마음도 감격으로 뜨거워졌으면 좋겠습니다.

1. 31절,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는 바울의 질문은 우리에게 대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대적이 되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와 싸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적들은 결코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적은 단순히 우리를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맞서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곧 하나님의 대적이 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주어도 얼마나 마음 든든하고 행복합니까? 부모님이 나를 위해 주고, 배우자가 나를 위해 주고, 자식이나 직장 동료가 나를 위해 줘도 마음 든든하고 즐겁고 행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주신다고 하면 그 얼마나 기쁘고 즐겁고 마음 든든하며 행복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위해 주신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두려워할 것도 없고 부러울 것도 없습니다. 시편 118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 118:6-7)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많은 전쟁은 한번도 군대, 무기의 힘을 통해서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승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그들 편에 서 계실 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TV 다큐 프로그램 중에서 백두산 호랑이를 생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냥개가 백두산 호랑이를 끝가지 추적하고 호랑이 굴까지 몰고 갑니다. 무서운 호랑이의 울부짖음과 공격 앞에서 사냥개는 전혀 굴하고 않고 끝까지 달려들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몸짓으로 보나 그 이빨의 날카로움으로 보나 호랑이가 훨씬 강해 보이는데 사냥개가 결코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드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 개들이 미쳤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른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네.’ 그런데 사냥개들이 저렇게 용감히 달려드는지, 그 이유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뒤에 총을 든 포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는 데가 있으니까 개가 범 무서운 줄을 모르고 그렇게 맹렬하게 대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우주에서 가장 강하신 하나님이 우리 뒤에 계시고, 우리편이 되시면 세상에 그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세상에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도 없습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주를 조성하신 분이십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셔서 나의 뒤를 돌봐 주시는데 누가 감히 나를 대적할 수 있단 말입니까?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랄에 우거하게 됩니다. 애굽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아브라함은 그곳에서도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게 되자, 그랄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자기 첩으로 삼으려고 그날 밤에 데려갑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허물이요 실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편이었습니다. 그 날 밤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네가 만일 이 여자를 취하면 너는 죽을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이에 깜짝 놀란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아내를 황급히 돌려보냈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실수가 있고 허물이 있음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에 우리의 편이 되어 주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편이 되어주시고, 우리를 항상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2. 32절,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사람들은 염려나 걱정, 두려움이나 불안에 압도 되면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허둥지둥 살 길을 찾게 됩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아무 것이나 붙잡습니다. 그리고 이내 후회하게 됩니다. 잡아서는 안 될 썩은 동아줄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논리가 없으면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엉뚱한 곳에서 살 길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체계적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배워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신앙적 논리가 생겨나고, 이것이 위기 시간에 우리의 믿음을 굳게 세워주기 때문입니다. 32절은 실망하고 낙심될 때 우리가 어떻게 신앙적 논리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여기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다’ 이는 분명코 아브라함을 두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6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아브라함이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여 100세에 약속의 씨로 주신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했습니다. 바치는 척 한 것이 아니라 진짜 칼을 잡아 내려치려고 했습니다. 이미 마음으로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천사가 황급히 막았습니다. 그 대신 수풀에 걸린 수양을 대신하여 번제로 바치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실제로 십자가 처형에 사랑하는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습니다. 왜요? 우리를 위해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도록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모의하고 추진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그리고 로마 총독 빌라도는 사형 언도를 내리고, 형을 집행하도록 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어 주었습니까? 유다가 돈 때문에 내어 주었습니까? 유대인들의 시기와 미움 때문에 내어 주었습니까? 권력의 자리를 잃을까봐 두려워했던 빌라도가 내어 주었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미 5장 8절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내어주심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이라고 하는 최고의 선물, 가장 소중한 선물을 주셨는데 그렇다면 그 무엇인들 아끼겠습니까? 여기에 대해 여러분은 어떤 답변을 하시겠습니까? 아낌없이 모든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염려합니까?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왜 불안해 하겠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뢸 것입니다. 

3. 33절, 누가 송사하리요

사도 바울은 법정에서 사용하는 ‘송사(고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사단이 의의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고발하는 하늘 심판 법정으로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합니다. 사실 현실의 삶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마귀로 부터 고발을 당하게 됩니다. 마귀의 칭호인 ‘디아볼로스(diabolos)’는 참소자, 비방자, 혹은 ‘중상자’ 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지만 현실에서는 죄로 인해 끊임없이 사단으로 부터 고발 당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양심이 먼저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또 죄를 지었군, 너 지난 번에도 그랬잖아. 언제까지 그럴 건데! 도대체 죄 짓는 것 외에 네가 할 수 있는게 뭐냐?’

기회를 엿보던 사단도 의로우신 하나님께 고소 고발합니다. ‘하나님, 저 아무개 보십시오. 당신의 백성인데도 당신의 뜻을 저버리고 계명을 어겼습니다. 저 더럽고 추한 죄인, 불법을 저지른 자를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자녀라고 감싸시렵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의와 거룩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참소합니다.

스가랴서 3장에서 사단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고발하는 환상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백성을 위해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마치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슥 3:2). 그래서 마귀는 여호수아가 죄인이므로 제사장 직무를 담당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를 택한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죄과를 없이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정한 관을 씌우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여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비록 더럽고 추하지만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의롭게 하시니 아무도 송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 대한 고발은 그 어떤 것도 성공하지 못하고 무위로 돌아갑니다. 우리를 향한 그 모든 소송은 다 무혐의로 끝나게 됩니다. 우리 죄를 고발하는 그 모든 시도는 다 실패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행위로써 판단하신다면 아무도 의로울 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을 보시고 의롭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롬 4:5)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이렇게 담대히 선언할 수 있습니다.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4.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정죄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분명히 그렇게 정죄하고 싶어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 스스로 정죄합니다. ‘너는 죄인이야. 너는 그것밖에 안돼. 너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야. 앞으로도 안될거야. 너는 이미 실패자야. 더 이상 소망이 없어.’ 이렇게 자신을 정죄합니다.

또한 율법이 우리를 정죄합니다. 계명을 어긴 우리의 죄목을 들어 조목조목 정죄합니다. 추상같이 단죄하는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원수 마귀도 정죄합니다. ‘네가 그러고도 하나님 자녀라고 할 수 있어? 하나님도 이미 너를 포기하셨을거야.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아. 이제 너에게 남은 것은 형벌이야.’ 누가 우리를 이 정죄에서 벗어나게 하겠습니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예,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로써 가능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마땅히 정죄 받아야 했던 우리 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정죄로 부터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이 받아들여졌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근거가 되셨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하나님 우편,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그 권세와 능력을 행사하시며 최종적인 승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넷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대언자이시며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우리 구원의 보증하십니다.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우리는 고소되어 법정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가 너무도 명백하기에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우리에게 마땅한 것은 죄에 대한 형벌이고 심판입니다. 그런데 재판관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무죄를 판결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죄가 없음을 선고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변호하시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죄값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형사 소송법에서 ‘일사부재리’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한번 판결이 난 사건에 대해서는 다시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는 원칙입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에 대해서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죄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판결은 없습니다. 이미 끝난 것입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어떤 고발도 어떤 정죄도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확신할 수 있는 변하지 않는 근거가 됩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일서 2장 1절은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대언자’는 돕는 자, 변호자 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결론: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성경적 진리로 우리 자신을 무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토대 위에 우리의 신앙이 견고해 지기를 원합니다. 고난과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같은 시험에서도 견디어 내고 이겨내기를 원합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는 우리의 씨름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전쟁터에 나가려면 이에 걸맞는 무장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지금 영적 전쟁터에 있습니다. 여기서 승리하려면 영적 무장이 필요합니다.
(엡 6:14-17)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여기서 특히 마귀의 불화살을 막을 수 있는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의심의 불화살을 쏘아될 때 이를 무위로 돌릴 수 있는 신앙적 논리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것은 성경적 진리로 우리 자신을 무장할 때 가능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감히 우리를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다른 모든 것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발하겠습니까?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우리를 죄인으로 단정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는단 말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깊이 숙고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신대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이런 신앙적 논리를 가진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겠습니까? 고린도후서 4장에서 보여주는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도 발견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고후 4:8-12)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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