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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 (05.07.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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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47회 작성일 May 15 2023

본문


*날짜: 2023년 5월 7일
*제목: 약속 있는 첫 계명 (가정의 달 1)
*본문: 에베소서 6: 1-4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인도한 사람입니다. 그는 가나안 땅을 차지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렇게 선포합니다.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가정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선포한 여호수아와 그 당대 사람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장로들이 아직 살아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세대 사람들이 죽고 그 다음 세대 사람들은 하나님은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행한 일들 또한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삿 2:10)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전혀 몰랐을까요? 살면서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었을까요?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일, 애굽에 내려진 열 가지 재앙, 홍해와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시고 날마다 만나를 내려주시고 반석에 물을 내시며 여리고성이 무너뜨린 일, 백성들은 하나님이 하신 이런 일들을 전혀 몰랐을까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아,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말이야“ 이렇게 말했을 때 아들이 ”네? 그게 누군데요?“ 이랬을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그 후에 일어난 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말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알다’라는 말은 관계적이고 체험적으로 안다 것을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나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경험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 이후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하신 특별한 역사, 히스토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 역사를 유산으로 이어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 백성들은 그 역사에 담겨있는 신앙은 이어 받지 못했습니다. 그 역사가 나와는 관계없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삶과는 연결시키지 못합니다. 역사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사실을 단지 지식으로만 안다면, 그 역사에 담겨있는 정신과 나에게 주는 교훈이 없다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것 때문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서 더 이상 하나님이 중심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은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미워하시는지, 그분을 어떻게 섬기는지, 그분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한지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이방 나라에 하나님을 전하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린 채, 가나안이 하는 것을 따라하며 삽니다.

사사기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이 사사기에 나오는 모든 문제의 원인입니다. 한 세대가 경험했던 하나님을 다음 세대에게 전하지 못한 것, 이것이 비극입니다. 그래서 그 후에 일어난 세대를 어떤 세대라고 말합니까?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다른 세대’라고 말합니다. 더 이상 이전 세대와 같지 않습니다. 다릅니다. 다른 세대입니다. 사사기서는 이 다른 세대가 겪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한 세대만 건너뛰면 이렇게 신앙이 죽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현실입니다.

1903년에 하와이 호눌룰루에 첫 한인 이민자들을 태운 배가 도착했습니다. 이로써 한인이민역사가 시작됐고, 동시에 한인이민교회도 시작됐습니다. 그때 이민교회는 참 많은 일을 했습니다. 특히 일제치하에 있었던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모금활동을 하는 등, 직접 간접적으로 많은 일에 동참했습니다. 이 호놀룰루에 세워진 첫 이민교회로 그 기념교회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불행히도 그 후손들은 어디에 갔는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조국과 한인사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지만 다음 세대를 준비하지 않아서 그만 도중에 맥이 끊긴 것입니다. 이렇게 다음 세대를 준비하지 않는 교회는 미래가 없습니다.

70-80년대에 이민 문이 열리면서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미국에 왔습니다. 그리고 북미에 3-4천여 개가 되는 한인교회가 세워졌는데, ‘과연 우리의 자녀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세요. 한인이민 1세에게 이민 온 목적을 물어보면 대부분 자녀들을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과연 우리의 자녀들이 미국 주류사회에서 진입해서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통계를 보면 잘 살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았는지를 물어 본다면 선뜻 그렇다고 답변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대학을 졸업하면 우리 자녀들 80-90%가 교회를 떠난다고 합니다. 이를 가리켜 ‘조용한 탈출(Silent Exodus)’이라고 부릅니다. 1세대처럼 교회가 분쟁이 나면 싸우고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조용히 자취를 감춘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장래를 준비하지 못하면 한인이민교회는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소리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이미 오래전 부터 있어왔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긴다 하고 주님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고 하지만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그 은혜의 길을 걷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가 이민 온 목적에서 멀어져 버린 셈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좋은 대학 졸업하고, 좋은 직장 가서 돈을 잘 벌어 부모에게 용돈도 잘 주고,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아니라 실상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 우리 이민 1세대가 자녀들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였기에 오늘날 그 다음 세대가 세상의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데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산다면 비극입니다. 그래서 우리 세대가 책임지고 노력하며 감당해야 할 부분은 다음 세대를 위해서 신앙을 전수해 주는 몫입니다. 솔직히 이 점에서 우리 모두 부족하고 늦었다고 느끼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오늘은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 대해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1. 부모에게 순종하라

부모와 자녀에 관한 오늘 본문에서는 먼저 자녀들에게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그 당시 로마제국에서 아이들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권한 아래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인권이 전혀 고려되지 않던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의 권위를 존중하며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마음에 탐탁지 않아도 존경하라는 거에요.

그 이유는 첫째로‘그것이 옳으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옳다’라는 것은 단순히 어떤 도덕적인 관점에서 옳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르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돌보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본래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 질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자녀에게 전달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보호하시는 계획이 부모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부모에게 자녀를 잘 다스리도록 권한을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부모의 권한 아래서 순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2절에서 우리가 부모님을 귀히 여겨야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나옵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시면서 동시에 이 계명을 지키면 너희를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3절 ‘땅에서 잘되고 장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오직 다섯 번째 계명,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이런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거에요.

그런데 왜 부모 공경이 첫 계명이 될까요? 열 가지 계명 가운데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할 윤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먼저 주신 것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계명입니다. 출애굽기 20:12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효를 중시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백성이 아닐지라도 지켜왔습니다. 못된 자식 외에 어느 누가 부모를 거역하고 업신여기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다섯 번 째 계명에 황금으로 테를 둘러서 아름답게 장식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 계명을 상식적 수준이라고 쉽게 넘어가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복을 누리며 사느냐하는 것이 다른 계명이 아닌 바로 이 계명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다섯 번 째 계명에 복을 붙들어 놓으셨을까요? 제 1계명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제 2계명 우상을 만들지 말며, 제 3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 되이 부르지 말고, 제 4계명 안식을 거룩히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지키는 것에 복을 약속해야 온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복을 약속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이 완고하여서 얼마나 순종하기를 싫어하는지를 하나님은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불행은 불순종에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불행은 근본적으로 환경 탓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 보기에 좋으실 만큼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어요. 그런데도 불순종했습니다. 순종하는 삶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복과 평강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교만하여 들나귀처럼 방황하고, 암소처럼 완강하여 하나님의 복을 거절합니다. 이것이 불행의 씨앗입니다. 행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부모를 통하여 순종의 도리를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제멋대로 행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에 실제 삶속에서, 눈에 보이는 부모님을 공경함으로 순종함을 배우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모든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은 거역하는 성품이 변하여 순종의 성품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불순종의 자식에서 순종의 자식으로 변화되어야 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명한 후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서로 복종하는 것을 성령 충만한 것과 연결시키고 있어요.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을 살려면 우리가 불순종의 영(마귀)을 따르지 않고 순종의 영(성령)을 쫓아서 피차 복종하는 체질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서 단숨에 완전해지지 않습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이며 죄의 성향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력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경건에 속한 모든 능력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순간마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순종의 삶이 가능합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억지가 아닌 자발적인 순종으로 새로운 질서와 권위를 창출하는 사람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으로 순종하며 살 때 우리의 삶은 풍성해 지고 부요해 집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공급됨으로 신령한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범사에 형통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복을 충만히 누리는 사람이 됩니다. 그 가정이 복됩니다. 그 자녀가 복을 받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자가 됩니다.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신자들의 전형적인 불효의 모습이 나옵니다. 부모를 공양하는 물질이 아까워서 고르반이라고 선언하고, 부모에 대한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르반’이란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재산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선언하고서 실상 하나님도 섬기지 않고, 부모님도 섬기지 않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 주님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위선적인 태도를 가리켜 이렇게 경고합니다.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핑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먼저 자녀들에게 권면합니다.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2.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자녀들에게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명한 후에 이어서 부모가 자식에게 특별히 아비들에게 명합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4절)

그 당시 사회는 아버지 중심의 가부장적인 제도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의 권한이 막강했습니다. 자칫하면 아버지의 일방적인 독선과 억압으로 마음이 여린 자녀들이 쉽게 상처를 받아 자신의 잠재력을 활짝 꽃 피워보지 못한 채 시들어 버릴 수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는 뜻은 ‘낙심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쓴 뿌리가 내리지 않도록 하라는 거예요. 부모가 자녀를 교육하는데 있어서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은 선결적 조건입니다. 부모가 먼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절제하는 자제력이 필요해요. ‘왜 부모는 성령 충만해야 하는가? 특히 아버지는 왜 성령 충만하기를 힘써야 하는가?’성령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있는 사람이 될 때에 자녀를 적절하게 교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가 난 상태에서 훈계하면 자녀를 노엽게 할 수 있습니다. 또 변덕스러운 말과 행동이 자녀를 쉽게 노엽게 해서 도리어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를 교육시킬 때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그때마다 기준이 달라지면 자녀에게 혼동을 가져오고, 나중에는 원망하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녀를 우리 기준과 생각, 그리고 감정에 따라 자녀를 대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명하고 있어요. 이것은 크리스천 부모들이 가진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가정에서 부모들의 삶과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일차적 훈련 장소는 가정입니다.

이를 위해서 부모가 먼저 주님의 교양과 훈계를 잘 받아야 해요. 부모 자신이 하나님 말씀에 의해 교훈을 받으며, 책망을 받고,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변화되기를 힘쓰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해요. 이보다 더 좋은 교육이 없습니다. 왜냐면 자녀들은 부모의 말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따라 변화됩니다. 사는 모습을 보고 닮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 부모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들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쓰는 사람들이다.’ 이것만 제대로 심어준다면 자녀 교육에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은 그 부귀와 영화가 극에 달했던 것만큼이나 실패도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신앙부흥을 위해서 7년의 대역사 끝에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하여 봉헌했지만 인생 후반에 갖가지 이방 신들을 섬기게 되어 신앙생활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 부터 탁월한 지혜를 받았지만 자식 농사에는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지혜 있는 사람이었기에 무엇보다도 자식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일에 심혈을 기울여서 자식 교육을 위해‘잠언’을 썼습니다.“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잠언 1:8). 이렇게 시작된 ‘내 아들아’는 잠언 1-7장에서 무려 열 세 번이나 계속됩니다. 이것은 잠언의 모든 교훈이 다 그 아들을 위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때로‘아들들아’라는 복수 호칭도 나오지만 대부분이 단수 호칭인 것으로 보아 후계자로 정했던 ‘르호보암’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훗날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원로대신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젊은 친구들의 말만 듣다가 그만 왕국이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스러운 통일 왕국이 어리석은 아들로 말미암아 일순간에 깨진 것입니다.

천하에서 가장 지혜로운 솔로몬이 왜 그 아들의 교육에 실패했을까요. 그것은 자식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어요. 솔로몬은 여러 이방 여인을 취하여 700명의 후궁과 300명의 첩들을 두고 살았는데 르호보암도 부친만큼은 못했으나 아내 18명과 첩 60명을 두었습니다.

또 솔로몬은 분별력을 상실한 노년에는 아스다롯 여신을 섬기고 이방 여인들을 위해서 그들의 신들을 위한 산당을 지었습니다. 르호보암 때에는 그보다 더 심해져 모든 산에 산당과 우상을 세웠고, 이로 말미암아 사회는 타락하여 심지어 남색하는 자들까지 있었어요. 결국 르호보암은 그 부친 솔로몬이 기록한 지혜서 잠언보다도 부친의 행동만을 본받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 보다 행동이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부모의 품을 떠나 타지로 갈 때에, 이미 장성하여 독립하여 떠나 살고 있는 자녀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녀는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순결하게 지켜 나갈 것이다. 악한 친구의 꾐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성장해 나갈 것이다.’이렇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아직 자녀가 우리의 품안에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미 출가한 후라면 이제 부모에게 남은 몫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로 매달리는 것입니다. 자식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눈물로 기도하는 모니카에게 암부로스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는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자녀를 위해서 더 많은 기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연로하신 분들은 손주들을 위해서 축복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자 영광입니까? 이 축복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결론: 자녀는 부모에게 주안에서 순종하십시다.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맙시다. 기도하기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기름 부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가정에 상처가 씻어지고, 싸매져서 아름다운 관계로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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