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한 것 같으나 패배하지 않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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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4회 작성일 Sep 28 2026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9월 27일
본문: 요한계시록 11:1–19
제목: 패배한 것 같으나 패배하지 않은 교회
설교자: 이강웅 목사
들어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살아온 세월도 다르고 지금 처한 형편도 다릅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비슷한 질문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오랜 세월을 살아오신 분들은 가끔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낯선 미국 땅에 와서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생활이 어려워도 예배드렸고,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잘 살기를 바라며 기도했습니다. 힘들어도 교회를 섬기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모든 것이 바라던 대로 된 것은 아닙니다. 오래 기도했는데도 해결되지 않은 일이 있고, 자녀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지만 여전히 마음 아픈 문제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요. “내가 이렇게 믿고 살아온 것이 정말 의미가 있었을까?”
젊은 세대는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전쟁과 재난의 소식은 끊이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조차 혼란스럽게 느껴지고, 교회는 점점 세상에서 밀려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묻게 됩니다.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정말 마지막 때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지금 고난을 지나고 있는 분은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하신다면 왜 내 삶은 이렇게 힘든가?”
질문의 모습은 달라도 그 밑바닥에는 하나의 공통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가? 지금 보이는 이 패배가 정말 마지막인가?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결과로 인생을 판단하는 데 익숙합니다. 열매가 보이면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보이지 않으면 실패했다고 여깁니다. 세상이 인정하면 이긴 것이고 밀려나면 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계시록 11장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도 실패라고 생각하시는가?
앞선 1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다시 예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1장은 그렇게 증언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길을 걷게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대했던 모습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짓밟히고, 하나님의 증인들은 죽임을 당합니다. 세상은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하며 기뻐하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속했는데 왜 짓밟힙니까? 충성했는데 왜 죽습니까? 세상이 점점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무엇을 붙들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지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아직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1. 당신은 짓밟혀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11장이 시작되자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측량한다는 것은 단순히 크기를 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시고 자기 것으로 구별하신다는 뜻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너를 안다. 너는 내 것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우리의 기대가 깨집니다.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성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다면 당연히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일이 잘 풀리고,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교회가 진리를 가지고 있다면 세상에서 점점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보호는 그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당신이 짓밟히지 않는다는 약속이 아니라, 짓밟혀도 당신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버리셨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도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잊으신 것도 아닙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거룩한 성이 짓밟히는 기간은 마흔두 달이고, 두 증인이 말씀을 전하는 기간은 1,260일입니다. 같은 기간입니다. 교회가 짓밟히는 바로 그 시간이 교회가 증언하는 시간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세상이 좋아진 다음에 증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이 힘을 얻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강해 보이는 때에도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말세의 징조를 보면서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가?”가 아닙니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그리고 이 시대 속에서 무엇을 증언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세상이 어두워진다고 그리스도의 왕권까지 약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악이 강해 보인다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지 못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마흔두 달이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악은 실제로 강합니다. 그러나 영원하지 않습니다. 고난은 깊어도 끝이 있습니다. 짐승에게 허락된 시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흔들릴수록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에야 믿음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닙니다. 자녀 문제로 마음이 무너질 때도, 몸이 예전 같지 않을 때도, 세상이 교회를 외면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우리는 주님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돌이켜 보면 어쩌면 여러분의 믿음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던 때는 모든 일이 잘 풀렸을 때가 아니라 가장 힘들었던 때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 힘들다고 너무 빨리 결론 내리지 마십시오. 당신은 짓밟혀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어려운 질문이 생깁니다. 짓밟히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죽는다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신다면서 결국 죽게 하신다면, 그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본문은 이제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2. 당신은 죽어도 패배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두 증인을 “두 촛대”라고 부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촛대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두 증인은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증언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7절에 이르면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이 그들과 전쟁하여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두 사람의 죽음만을 보여 주는 장면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증언하는 교회를 침묵시키려 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증인들은 죽고 세상은 기뻐합니다. 눈앞의 모습만 보면 짐승이 이겼고 교회가 진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그렇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특히 인생의 후반에 들어서면 전에는 쉽게 하던 일이 힘들어지고, 직함도 내려놓고 역할도 줄어듭니다. 평생 다른 사람을 돌보았는데 이제는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몸은 쇠약해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기도 하지요. 그것이 아픈 것은 단지 몸이 불편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내가 점점 작아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묻게 됩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도 나는 여전히 의미가 있는 사람인가?”
바로 그때 세상은 속삭입니다. “이제 너는 끝나 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당신의 마지막을 결정하는가?
7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그들은 사명을 실패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증언을 마치고 죽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명을 다했으니 괜찮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명을 다했다는 사실만으로 죽음의 아픔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충성이 무덤을 열지는 못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웁니다. 몸이 무너지면 두렵습니다. 평생 기도했는데 응답이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우리의 눈물을 믿음이 없다고 꾸짖지 않습니다. 믿음은 울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울면서도 그 눈물이 마지막은 아니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마지막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사흘 반 뒤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두 증인에게 들어갑니다. 죽었던 증인들이 자기 발로 일어섭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8절은 이 사건을 십자가와 연결합니다. 두 증인의 시체가 놓인 곳을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합니다. 골고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흩어졌고 예수님의 몸은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십자가만 보았다면 패배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요한은 “유다 지파의 사자가 이겼다”는 말을 듣지만, 돌아보았을 때 그가 본 것은 죽임당한 어린양이었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승리입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힘을 과시하여 얻은 승리가 아니라, 어린양께서 자신을 내어 주시고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심으로 이루신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우리가 얼마나 강하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내가 평생 얼마나 잘했느냐가 마지막 근거도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죽임당하셨으나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 내가 속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성도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이겼다고 말합니다. 순서를 잘 보십시오. 먼저 우리의 충성이 아닙니다. 먼저 어린양의 피입니다. 우리가 충성해서 그리스도를 승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끝까지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흔들리는 날이 있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가 흔들린다고 십자가까지 흔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의심한다고 부활이 취소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워지면서 과거의 잘못들이 생각날 수도 있습니다. 자녀에게 주었던 상처가 떠오르고, 더 사랑하지 못했던 일이 마음에 걸리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웠던 순간도 생각날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의 소망은 신앙 성적표에 있을 수 없습니다. 어린양의 피는 우리의 충성을 칭찬하는 피이기 전에 우리의 죄를 씻는 피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에게서 하나씩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침내 내 손으로 아무것도 붙들 수 없는 날이 와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끝까지 붙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끝까지 붙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지막을 죽음에게 넘겨주지 마십시오. 당신은 죽어도 패배하지 않습니다.
3. 당신의 마지막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내가 모든 결과를 보지 못하고 떠난다면 어떻게 합니까? 자녀를 위해 평생 드린 기도의 결과도, 내가 뿌린 믿음의 씨앗이 맺는 열매도 보지 못한 채 떠난다면 무엇을 붙들어야 할까요?
스데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 현장에는 사울이라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 사울이 훗날 사도 바울이 되어 복음을 들고 이방 세계로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 증언의 결과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순간 하늘이 열렸고, 스데반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자기 증언의 결과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모든 결과를 확인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를 위해 평생 기도해도 그 마지막 결과를 보지 못할 수 있고, 내가 뿌린 믿음의 씨앗이 어떻게 자라는지 다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이 모든 결과를 보고 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알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은 여기서 우리 한 사람의 마지막을 넘어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까지 보여 줍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하늘에서 큰 음성이 들립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더 혼란스러워질지, 교회가 어떤 어려움을 지나게 될지,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압니다.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때 가서 비로소 왕이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영광과 권세와 능력으로 통치하시는 왕이십니다. 다만 지금은 세상이 그분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고, 때로는 악이 이기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모든 사람 앞에 아주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세의 징조를 보면서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계산하는 데 마음을 빼앗기기보다 깨어서 주님을 믿으십시오. 미혹이 많아질수록 말씀을 붙들고, 교회가 약해지는 것처럼 보일수록 우리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면 됩니다. 마흔두 달에는 끝이 있고 사흘 반에도 끝이 있습니다. 짐승에게는 마흔두 달이 있지만 그리스도께는 세세토록이 있습니다.
18절은 작은 자든 큰 자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상 주실 때가 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수고 때문이 아닙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믿음과 눈물과 수고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알아주지 않았다고 하나님도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몰랐던 기도와 아무도 보지 않았던 섬김까지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19절에 이르면 하늘의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입니다. 오늘 본문 11장의 처음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측량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안다. 너는 내 것이다.” 그 말씀 이후 교회는 짓밟혔고 증인들은 죽었으며 세상은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무엇이 보입니까? 짐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입니다. 언약궤는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 자기 백성을 아셨던 하나님께서 마지막에도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십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우리의 몸도 변하고 형편도 달라집니다. 때로는 우리의 믿음마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이야기는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무덤에서도 끝나지 않습니다. 당신의 마지막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맺는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처음에 물었습니다. 당신이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도 실패라고 생각하시는가?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두 증인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여러분의 삶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자녀를 위해 오래 기도했는데 아직 달라진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기도해 온 문제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잊으신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었습니다. 두 증인도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에게도 부활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더 잘 믿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더 열심히 해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보여 드리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훌륭했느냐가 아니라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 이제 힘이 예전 같지 않아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어도 괜찮습니다. 내가 주님을 붙드는 힘은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붙드시는 손은 약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나는 짓밟혀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나는 죽어도 패배하지 않습니다. 나의 마지막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한 사람의 인생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지고 악이 강해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마지막은 아닙니다. 짐승에게는 마흔두 달이 있지만 그리스도께는 세세토록이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깨어서 주님을 믿고, 우리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어느 날 일곱째 나팔이 울릴 것입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이 우리 앞에 있어도 죽음이 우리의 끝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패배한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결코 패배하지 않습니다.
날짜: 2026년 9월 27일
본문: 요한계시록 11:1–19
제목: 패배한 것 같으나 패배하지 않은 교회
설교자: 이강웅 목사
들어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살아온 세월도 다르고 지금 처한 형편도 다릅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비슷한 질문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오랜 세월을 살아오신 분들은 가끔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낯선 미국 땅에 와서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생활이 어려워도 예배드렸고,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잘 살기를 바라며 기도했습니다. 힘들어도 교회를 섬기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모든 것이 바라던 대로 된 것은 아닙니다. 오래 기도했는데도 해결되지 않은 일이 있고, 자녀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지만 여전히 마음 아픈 문제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요. “내가 이렇게 믿고 살아온 것이 정말 의미가 있었을까?”
젊은 세대는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전쟁과 재난의 소식은 끊이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조차 혼란스럽게 느껴지고, 교회는 점점 세상에서 밀려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묻게 됩니다.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정말 마지막 때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지금 고난을 지나고 있는 분은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하신다면 왜 내 삶은 이렇게 힘든가?”
질문의 모습은 달라도 그 밑바닥에는 하나의 공통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가? 지금 보이는 이 패배가 정말 마지막인가?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결과로 인생을 판단하는 데 익숙합니다. 열매가 보이면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보이지 않으면 실패했다고 여깁니다. 세상이 인정하면 이긴 것이고 밀려나면 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계시록 11장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도 실패라고 생각하시는가?
앞선 1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다시 예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1장은 그렇게 증언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길을 걷게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대했던 모습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짓밟히고, 하나님의 증인들은 죽임을 당합니다. 세상은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하며 기뻐하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속했는데 왜 짓밟힙니까? 충성했는데 왜 죽습니까? 세상이 점점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무엇을 붙들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지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아직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1. 당신은 짓밟혀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11장이 시작되자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측량한다는 것은 단순히 크기를 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시고 자기 것으로 구별하신다는 뜻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너를 안다. 너는 내 것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우리의 기대가 깨집니다.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성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다면 당연히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일이 잘 풀리고,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교회가 진리를 가지고 있다면 세상에서 점점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보호는 그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당신이 짓밟히지 않는다는 약속이 아니라, 짓밟혀도 당신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버리셨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도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잊으신 것도 아닙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거룩한 성이 짓밟히는 기간은 마흔두 달이고, 두 증인이 말씀을 전하는 기간은 1,260일입니다. 같은 기간입니다. 교회가 짓밟히는 바로 그 시간이 교회가 증언하는 시간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세상이 좋아진 다음에 증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이 힘을 얻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강해 보이는 때에도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말세의 징조를 보면서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가?”가 아닙니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그리고 이 시대 속에서 무엇을 증언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세상이 어두워진다고 그리스도의 왕권까지 약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악이 강해 보인다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지 못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마흔두 달이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악은 실제로 강합니다. 그러나 영원하지 않습니다. 고난은 깊어도 끝이 있습니다. 짐승에게 허락된 시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흔들릴수록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에야 믿음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닙니다. 자녀 문제로 마음이 무너질 때도, 몸이 예전 같지 않을 때도, 세상이 교회를 외면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우리는 주님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돌이켜 보면 어쩌면 여러분의 믿음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던 때는 모든 일이 잘 풀렸을 때가 아니라 가장 힘들었던 때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 힘들다고 너무 빨리 결론 내리지 마십시오. 당신은 짓밟혀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어려운 질문이 생깁니다. 짓밟히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죽는다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신다면서 결국 죽게 하신다면, 그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본문은 이제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2. 당신은 죽어도 패배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두 증인을 “두 촛대”라고 부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촛대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두 증인은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증언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7절에 이르면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이 그들과 전쟁하여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두 사람의 죽음만을 보여 주는 장면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증언하는 교회를 침묵시키려 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증인들은 죽고 세상은 기뻐합니다. 눈앞의 모습만 보면 짐승이 이겼고 교회가 진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그렇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특히 인생의 후반에 들어서면 전에는 쉽게 하던 일이 힘들어지고, 직함도 내려놓고 역할도 줄어듭니다. 평생 다른 사람을 돌보았는데 이제는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몸은 쇠약해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기도 하지요. 그것이 아픈 것은 단지 몸이 불편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내가 점점 작아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묻게 됩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도 나는 여전히 의미가 있는 사람인가?”
바로 그때 세상은 속삭입니다. “이제 너는 끝나 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당신의 마지막을 결정하는가?
7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그들은 사명을 실패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증언을 마치고 죽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명을 다했으니 괜찮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명을 다했다는 사실만으로 죽음의 아픔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충성이 무덤을 열지는 못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웁니다. 몸이 무너지면 두렵습니다. 평생 기도했는데 응답이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우리의 눈물을 믿음이 없다고 꾸짖지 않습니다. 믿음은 울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울면서도 그 눈물이 마지막은 아니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마지막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사흘 반 뒤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두 증인에게 들어갑니다. 죽었던 증인들이 자기 발로 일어섭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8절은 이 사건을 십자가와 연결합니다. 두 증인의 시체가 놓인 곳을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합니다. 골고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흩어졌고 예수님의 몸은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십자가만 보았다면 패배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요한은 “유다 지파의 사자가 이겼다”는 말을 듣지만, 돌아보았을 때 그가 본 것은 죽임당한 어린양이었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승리입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힘을 과시하여 얻은 승리가 아니라, 어린양께서 자신을 내어 주시고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심으로 이루신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우리가 얼마나 강하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내가 평생 얼마나 잘했느냐가 마지막 근거도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죽임당하셨으나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 내가 속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성도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이겼다고 말합니다. 순서를 잘 보십시오. 먼저 우리의 충성이 아닙니다. 먼저 어린양의 피입니다. 우리가 충성해서 그리스도를 승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끝까지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흔들리는 날이 있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가 흔들린다고 십자가까지 흔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의심한다고 부활이 취소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워지면서 과거의 잘못들이 생각날 수도 있습니다. 자녀에게 주었던 상처가 떠오르고, 더 사랑하지 못했던 일이 마음에 걸리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웠던 순간도 생각날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의 소망은 신앙 성적표에 있을 수 없습니다. 어린양의 피는 우리의 충성을 칭찬하는 피이기 전에 우리의 죄를 씻는 피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에게서 하나씩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침내 내 손으로 아무것도 붙들 수 없는 날이 와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끝까지 붙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끝까지 붙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지막을 죽음에게 넘겨주지 마십시오. 당신은 죽어도 패배하지 않습니다.
3. 당신의 마지막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내가 모든 결과를 보지 못하고 떠난다면 어떻게 합니까? 자녀를 위해 평생 드린 기도의 결과도, 내가 뿌린 믿음의 씨앗이 맺는 열매도 보지 못한 채 떠난다면 무엇을 붙들어야 할까요?
스데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 현장에는 사울이라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 사울이 훗날 사도 바울이 되어 복음을 들고 이방 세계로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 증언의 결과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순간 하늘이 열렸고, 스데반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자기 증언의 결과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모든 결과를 확인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를 위해 평생 기도해도 그 마지막 결과를 보지 못할 수 있고, 내가 뿌린 믿음의 씨앗이 어떻게 자라는지 다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이 모든 결과를 보고 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알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은 여기서 우리 한 사람의 마지막을 넘어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까지 보여 줍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하늘에서 큰 음성이 들립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더 혼란스러워질지, 교회가 어떤 어려움을 지나게 될지,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압니다.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때 가서 비로소 왕이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영광과 권세와 능력으로 통치하시는 왕이십니다. 다만 지금은 세상이 그분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고, 때로는 악이 이기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모든 사람 앞에 아주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세의 징조를 보면서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계산하는 데 마음을 빼앗기기보다 깨어서 주님을 믿으십시오. 미혹이 많아질수록 말씀을 붙들고, 교회가 약해지는 것처럼 보일수록 우리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면 됩니다. 마흔두 달에는 끝이 있고 사흘 반에도 끝이 있습니다. 짐승에게는 마흔두 달이 있지만 그리스도께는 세세토록이 있습니다.
18절은 작은 자든 큰 자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상 주실 때가 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수고 때문이 아닙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믿음과 눈물과 수고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알아주지 않았다고 하나님도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몰랐던 기도와 아무도 보지 않았던 섬김까지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19절에 이르면 하늘의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입니다. 오늘 본문 11장의 처음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측량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안다. 너는 내 것이다.” 그 말씀 이후 교회는 짓밟혔고 증인들은 죽었으며 세상은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무엇이 보입니까? 짐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입니다. 언약궤는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 자기 백성을 아셨던 하나님께서 마지막에도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십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우리의 몸도 변하고 형편도 달라집니다. 때로는 우리의 믿음마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이야기는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무덤에서도 끝나지 않습니다. 당신의 마지막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맺는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처음에 물었습니다. 당신이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도 실패라고 생각하시는가?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두 증인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여러분의 삶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자녀를 위해 오래 기도했는데 아직 달라진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기도해 온 문제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잊으신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었습니다. 두 증인도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에게도 부활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더 잘 믿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더 열심히 해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보여 드리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훌륭했느냐가 아니라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 이제 힘이 예전 같지 않아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어도 괜찮습니다. 내가 주님을 붙드는 힘은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붙드시는 손은 약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나는 짓밟혀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나는 죽어도 패배하지 않습니다. 나의 마지막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한 사람의 인생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지고 악이 강해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마지막은 아닙니다. 짐승에게는 마흔두 달이 있지만 그리스도께는 세세토록이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깨어서 주님을 믿고, 우리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어느 날 일곱째 나팔이 울릴 것입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이 우리 앞에 있어도 죽음이 우리의 끝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패배한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결코 패배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