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다시 ( 09.20.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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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4회 작성일 Sep 21 2026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9월 20일
본문: 요한계시록 10:1-11
제목: 그래도 다시
설교자: 이강웅 목사
들어가는 말: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서 이름 부르며 기도해 온 사람이 있습니까? 자녀일 수도 있고 배우자일 수도 있습니다. 형제일 수도 있고 손자 손녀일 수도 있겠지요. 그 이름을 얼마나 오래 불러 왔는지 이제는 헤아리기도 어려울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오래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언젠가는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흘렀습니다. 사람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처음에는 길고 간절했던 기도도 어느새 짧아집니다. 어떤 날에는 그 이름을 불러 놓고도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가만히 있게 됩니다. 그러다 마음 깊은 곳에서 질문이 올라옵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정말 저 사람이 변하기는 할까요?”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생각까지 찾아옵니다.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오늘 말씀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붙잡습니다. 요한계시록 9장은 무거운 한 문장으로 끝납니다. “회개치 아니하더라.” 하나님께서 나팔을 부셨습니다. 세상을 흔드셨습니다. 인간이 붙들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지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 정도면 사람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찾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회개치 아니하더라.” 무서운 말씀입니다. 인간의 깊은 문제는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으려는 완고함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조금 더 설득하면 돌아올 수 있는 존재였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게 말씀하셨는데도 듣지 않습니다. 그렇게 흔드셨는데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도 말씀을 거두셔도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 우리가 예상치 못한 말씀이 들려옵니다.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9장은 “회개치 아니하더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10장은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다시’를 가능케 하는 것입니까?
1.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마지막을 이루시는 분은 아십니다
요한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힘센 천사를 봅니다. 그가 외치자 일곱 우레가 소리를 냅니다. 요한이 그것을 기록하려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일곱 우레가 무엇을 말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록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감추어진 미래를 알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 미리 알고 싶습니다. 알면 덜 두려울 것 같고, 조금이라도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면 안심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기록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고 순종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말씀해 주시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설명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응답받지 못한 “왜”가 얼마나 많습니까? 왜 이 기도는 이렇게 오래 걸립니까? 왜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돌아오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길로 나를 데리고 가십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알면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고, 결과를 미리 알면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왜”에 대해 대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7절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이 말씀은 내가 원하는 일이 내가 원하는 때와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신 구원과 나라가 마침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과정을 이해한 뒤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길은 내가 마지막을 알기 때문에 걷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을 이루실 분을 알기 때문에 걷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등을 돌릴 수도 있고, 끝까지 버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완고함이 하나님의 손을 묶어 둘 수는 없습니다.
종종 우리는 내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보고 마지막을 결정해 버립니다. “이렇게 오래 기도했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끝난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찍어 놓은 마침표를 지우며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리라.” 그러므로 지금 보고 있는 현상을 하나님의 최종 결론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여기서 본문은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미래를 좀 더 보여 주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미래를 더 이상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가서 그 두루마리를 가지라”고 하시고, 이어서 “갖다 먹어 버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미래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미래를 다 보여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먹어야 할 말씀은 주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다시 보내시기 전에 먼저 말씀을 먹이십니다
“갖다 먹어 버리라.” 이 장면은 에스겔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선지자로 보내실 때에도 두루마리를 먹게 하셨습니다. 그 안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입에서는 꿀같이 달았습니다. 내용이 즐거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달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순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먼저 “가서 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갖다 먹어라.”
여기서 설교의 대상이 바뀝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그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이 변해야 하는데. 저 사람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저 사람 마음이 좀 열려야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가리키던 우리의 손가락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먹어라.” 여기서 말씀의 칼끝이 돌아옵니다. 저 사람에게서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말씀은 다른 사람을 바꾸기 전에 먼저 나에게 와야 합니다. 말씀이 나를 판단하고, 나를 회개 시키며, 내가 옳다고 붙들고 있던 것까지 내려놓게 해야 합니다.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 앞에 서 본 사람을 보내십니다. 말씀 때문에 무너져 보고, 바로 그 말씀 때문에 용서받고 다시 일어나 본 사람을 보내십니다.
요한이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 입에서는 달았지만 배에서는 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구원의 기쁨과 심판의 엄중함이 함께 있습니다. 우리도 그 달고 쓴 말씀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붙들고 자녀와 가족을 위해 오래 기다리는 시간은 때로 쓰디 씁니다. 어떤 기도는 응답보다 눈물이 먼저 쌓입니다. 약속은 단데 기다림은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의문이 풀려서 마음이 다시 강해진 뒤에 요한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쓴맛이 아직 배에 남아 있는데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그러므로 “다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씀의 단맛도 알고 기다림의 쓴맛도 아는 사람이, 그래도 그 말씀을 품고 다시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지막 질문이 남습니다. 말씀을 먹었다고 현실이 곧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먹었다고 내가 갑자기 강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다시 일어섭니까? 무엇을 믿고 또 갑니까? 내 결심입니까? 내 인내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지막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이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역사의 마지막을 붙들고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3. 죽임당하셨으나 서 계신 어린양이 역사를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것과 그 결과를 소유하는 것을 자주 혼동합니다. 기도했으면 응답을 보고 싶습니다. 씨를 뿌렸으면 열매를 보고 싶습니다. 사랑했으면 그 사랑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지금까지 한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나.”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자리를 다시 정해 줍니다.
우리는 결과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증언입니다.
그렇다면 결과를 손에 쥐지 못하면서도 무엇을 믿고 다시 갈 수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조금만 더 힘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잘될 것이다”라는 막연한 희망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성경은 우리에게 한 분을 보여 줍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하나님의 손에는 두루마리가 있었지만 그것을 펴고 인을 뗄 자가 없었습니다. 요한이 웁니다. 누가 이 역사를 완성할 것인가? 누가 악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며 이 무너진 세상을 하나님의 목적지까지 이끌어 갈 것인가? 그때 장로가 말합니다.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가 이겼으니.”
요한이 고개를 듭니다. 우리는 이제 모든 원수를 쓰러뜨리는 강한 사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요한이 본 것은 전혀 뜻밖의 모습이었습니다.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이 서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요한계시록의 복음이 있습니다. 세상은 상대를 쓰러뜨리고 살아남는 것을 승리라고 부릅니다. 힘으로 눌러야 이겼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승리는 우리가 생각한 모습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갈보리에서 예수님은 붙잡히셨습니다. 조롱당하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한다면 십자가는 실패였습니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도망쳤습니다. 무덤은 닫혔습니다. 모든 게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서 복음의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제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제거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생명의 주를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가장 큰 거절을 구원의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눈에 보이는 장면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요한이 본 어린양을 다시 보십시오. 그분에게는 죽임당한 흔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 누워 있지 않습니다.
서 계십니다. 죽임당하셨으나 서 계십니다. 거절당하셨으나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께서 하나님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십니다. 이제 앞에서 던졌던 질문의 답이 분명해집니다. 마지막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죽임당하셨으나 서 계신 어린양을 통하여 역사를 완성하십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마지막은 어린양의 손에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다시 갈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잘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반드시 내 눈으로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다시 가는 이유는 결과를 알기 때문이 아니라 어린양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열심이나 인내에 있지 않습니다.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시고, 거절당하셨으나 승리하셨으며, 지금도 역사를 붙들고 계시는 어린양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고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위대한 일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보이는 장면이 마지막이라고 너무 빨리 말하지 마십시오.
아직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서 불러 온 바로 그 이름으로 돌아가 봅시다. 처음에는 곧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렀습니다. 기도를 계속했지만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습니다. 이제는 그 사람보다 내가 먼저 늙어 갑니다. 예전에는 “언제 돌아올까?”를 물었는데, 이제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저 사람이 돌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우리는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짜를 알려 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결말을 반드시 내 눈으로 보게 될 것이라고도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몰라도 붙들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그리고 그 약속은 빈말이 아닙니다. 그 약속의 보증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죽임당하셨으나 서 계신 어린양입니다.
사람들이 듣지 않습니까? 그래도 다시. 아직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래도 다시. 오래 기도했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다시.
이것은 이를 악물고 한 번 더 버텨 보자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더 강해져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십자가가 이미 보여 주었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거절조차 하나님의 복음과 구원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눈앞의 거절을 마지막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자녀를 보며 너무 빨리 마침표를 찍지 마십시오. 오랫동안 응답되지 않은 기도를 붙들고 “이제 끝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결과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기도하십시오. 다시 사랑하십시오. 다시 복음을 말하십시오. 먼저 그 말씀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로 다시 가십시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왜 다시 입니까? 내가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어린양께서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죽임당하셨으나 서 계십니다. 거절당하셨으나 승리하셨습니다. 역사의 마지막은 그분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마지막이 아닙니다.
사람이 거절해도,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내 마음에 다시 기도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아도—
그래도, 다시.
날짜: 2026년 9월 20일
본문: 요한계시록 10:1-11
제목: 그래도 다시
설교자: 이강웅 목사
들어가는 말: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서 이름 부르며 기도해 온 사람이 있습니까? 자녀일 수도 있고 배우자일 수도 있습니다. 형제일 수도 있고 손자 손녀일 수도 있겠지요. 그 이름을 얼마나 오래 불러 왔는지 이제는 헤아리기도 어려울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오래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언젠가는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흘렀습니다. 사람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처음에는 길고 간절했던 기도도 어느새 짧아집니다. 어떤 날에는 그 이름을 불러 놓고도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가만히 있게 됩니다. 그러다 마음 깊은 곳에서 질문이 올라옵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정말 저 사람이 변하기는 할까요?”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생각까지 찾아옵니다.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오늘 말씀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붙잡습니다. 요한계시록 9장은 무거운 한 문장으로 끝납니다. “회개치 아니하더라.” 하나님께서 나팔을 부셨습니다. 세상을 흔드셨습니다. 인간이 붙들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지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 정도면 사람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찾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회개치 아니하더라.” 무서운 말씀입니다. 인간의 깊은 문제는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으려는 완고함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조금 더 설득하면 돌아올 수 있는 존재였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게 말씀하셨는데도 듣지 않습니다. 그렇게 흔드셨는데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도 말씀을 거두셔도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 우리가 예상치 못한 말씀이 들려옵니다.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9장은 “회개치 아니하더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10장은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다시’를 가능케 하는 것입니까?
1.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마지막을 이루시는 분은 아십니다
요한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힘센 천사를 봅니다. 그가 외치자 일곱 우레가 소리를 냅니다. 요한이 그것을 기록하려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일곱 우레가 무엇을 말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록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감추어진 미래를 알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 미리 알고 싶습니다. 알면 덜 두려울 것 같고, 조금이라도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면 안심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기록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고 순종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말씀해 주시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설명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응답받지 못한 “왜”가 얼마나 많습니까? 왜 이 기도는 이렇게 오래 걸립니까? 왜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돌아오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길로 나를 데리고 가십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알면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고, 결과를 미리 알면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왜”에 대해 대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7절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이 말씀은 내가 원하는 일이 내가 원하는 때와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신 구원과 나라가 마침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과정을 이해한 뒤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길은 내가 마지막을 알기 때문에 걷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을 이루실 분을 알기 때문에 걷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등을 돌릴 수도 있고, 끝까지 버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완고함이 하나님의 손을 묶어 둘 수는 없습니다.
종종 우리는 내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보고 마지막을 결정해 버립니다. “이렇게 오래 기도했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끝난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찍어 놓은 마침표를 지우며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리라.” 그러므로 지금 보고 있는 현상을 하나님의 최종 결론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여기서 본문은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미래를 좀 더 보여 주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미래를 더 이상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가서 그 두루마리를 가지라”고 하시고, 이어서 “갖다 먹어 버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미래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미래를 다 보여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먹어야 할 말씀은 주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다시 보내시기 전에 먼저 말씀을 먹이십니다
“갖다 먹어 버리라.” 이 장면은 에스겔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선지자로 보내실 때에도 두루마리를 먹게 하셨습니다. 그 안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입에서는 꿀같이 달았습니다. 내용이 즐거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달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순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먼저 “가서 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갖다 먹어라.”
여기서 설교의 대상이 바뀝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그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이 변해야 하는데. 저 사람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저 사람 마음이 좀 열려야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가리키던 우리의 손가락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먹어라.” 여기서 말씀의 칼끝이 돌아옵니다. 저 사람에게서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말씀은 다른 사람을 바꾸기 전에 먼저 나에게 와야 합니다. 말씀이 나를 판단하고, 나를 회개 시키며, 내가 옳다고 붙들고 있던 것까지 내려놓게 해야 합니다.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 앞에 서 본 사람을 보내십니다. 말씀 때문에 무너져 보고, 바로 그 말씀 때문에 용서받고 다시 일어나 본 사람을 보내십니다.
요한이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 입에서는 달았지만 배에서는 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구원의 기쁨과 심판의 엄중함이 함께 있습니다. 우리도 그 달고 쓴 말씀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붙들고 자녀와 가족을 위해 오래 기다리는 시간은 때로 쓰디 씁니다. 어떤 기도는 응답보다 눈물이 먼저 쌓입니다. 약속은 단데 기다림은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의문이 풀려서 마음이 다시 강해진 뒤에 요한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쓴맛이 아직 배에 남아 있는데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그러므로 “다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씀의 단맛도 알고 기다림의 쓴맛도 아는 사람이, 그래도 그 말씀을 품고 다시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지막 질문이 남습니다. 말씀을 먹었다고 현실이 곧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먹었다고 내가 갑자기 강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다시 일어섭니까? 무엇을 믿고 또 갑니까? 내 결심입니까? 내 인내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지막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이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역사의 마지막을 붙들고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3. 죽임당하셨으나 서 계신 어린양이 역사를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것과 그 결과를 소유하는 것을 자주 혼동합니다. 기도했으면 응답을 보고 싶습니다. 씨를 뿌렸으면 열매를 보고 싶습니다. 사랑했으면 그 사랑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지금까지 한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나.”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자리를 다시 정해 줍니다.
우리는 결과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증언입니다.
그렇다면 결과를 손에 쥐지 못하면서도 무엇을 믿고 다시 갈 수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조금만 더 힘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잘될 것이다”라는 막연한 희망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성경은 우리에게 한 분을 보여 줍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하나님의 손에는 두루마리가 있었지만 그것을 펴고 인을 뗄 자가 없었습니다. 요한이 웁니다. 누가 이 역사를 완성할 것인가? 누가 악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며 이 무너진 세상을 하나님의 목적지까지 이끌어 갈 것인가? 그때 장로가 말합니다.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가 이겼으니.”
요한이 고개를 듭니다. 우리는 이제 모든 원수를 쓰러뜨리는 강한 사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요한이 본 것은 전혀 뜻밖의 모습이었습니다.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이 서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요한계시록의 복음이 있습니다. 세상은 상대를 쓰러뜨리고 살아남는 것을 승리라고 부릅니다. 힘으로 눌러야 이겼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승리는 우리가 생각한 모습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갈보리에서 예수님은 붙잡히셨습니다. 조롱당하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한다면 십자가는 실패였습니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도망쳤습니다. 무덤은 닫혔습니다. 모든 게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서 복음의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제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제거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생명의 주를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가장 큰 거절을 구원의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눈에 보이는 장면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요한이 본 어린양을 다시 보십시오. 그분에게는 죽임당한 흔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 누워 있지 않습니다.
서 계십니다. 죽임당하셨으나 서 계십니다. 거절당하셨으나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께서 하나님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십니다. 이제 앞에서 던졌던 질문의 답이 분명해집니다. 마지막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죽임당하셨으나 서 계신 어린양을 통하여 역사를 완성하십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마지막은 어린양의 손에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다시 갈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잘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반드시 내 눈으로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다시 가는 이유는 결과를 알기 때문이 아니라 어린양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열심이나 인내에 있지 않습니다.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시고, 거절당하셨으나 승리하셨으며, 지금도 역사를 붙들고 계시는 어린양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고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위대한 일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보이는 장면이 마지막이라고 너무 빨리 말하지 마십시오.
아직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서 불러 온 바로 그 이름으로 돌아가 봅시다. 처음에는 곧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렀습니다. 기도를 계속했지만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습니다. 이제는 그 사람보다 내가 먼저 늙어 갑니다. 예전에는 “언제 돌아올까?”를 물었는데, 이제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저 사람이 돌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우리는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짜를 알려 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결말을 반드시 내 눈으로 보게 될 것이라고도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몰라도 붙들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그리고 그 약속은 빈말이 아닙니다. 그 약속의 보증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죽임당하셨으나 서 계신 어린양입니다.
사람들이 듣지 않습니까? 그래도 다시. 아직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래도 다시. 오래 기도했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다시.
이것은 이를 악물고 한 번 더 버텨 보자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더 강해져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십자가가 이미 보여 주었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거절조차 하나님의 복음과 구원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눈앞의 거절을 마지막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자녀를 보며 너무 빨리 마침표를 찍지 마십시오. 오랫동안 응답되지 않은 기도를 붙들고 “이제 끝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결과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기도하십시오. 다시 사랑하십시오. 다시 복음을 말하십시오. 먼저 그 말씀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로 다시 가십시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왜 다시 입니까? 내가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어린양께서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죽임당하셨으나 서 계십니다. 거절당하셨으나 승리하셨습니다. 역사의 마지막은 그분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마지막이 아닙니다.
사람이 거절해도,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내 마음에 다시 기도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아도—
그래도,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