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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04.30.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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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62회 작성일 May 15 2023

본문


*날짜: 2023년 4월 30일
*제목: 하나님의 신실하심
*본문: 로마서 3: 1-8
*설교자: 이강웅 목사


본문: 로마서 3:1-8

서론: 누가복음 7장에는 예수께서 시몬이라 하는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식사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함께 교제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초대한 주인이 아닌,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소문난 여자로 부터 환대를 받으십니다. 불청객이었던 그 여인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으며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붓는,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소위 스캔들이 날 법한 일인데도 예수님은 거절하지 않으시고, 여인이 섬기는 그대로를 받으셨습니다.

그러자 주인 시몬은 아주 못마땅했습니다. 마음 속으로 비난의 화살을 예수를 향해 쏘았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선지자더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동네에서 수치스러운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예수님은 시몬의 생각을 아시고, 그에게 묻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는데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눅 7:41-42)

시몬은 당연히 “많이 탕감을 받은 자니이다”고 답변하였습니다. 그러자 “네 판단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시몬이 못마땅하게 여겼던 여자가 주님께 보인 태도와 행동들과 시몬이 주님께 했던 홀대와 극렬히 대조시키며 말씀하십니다. (눅 7:44-46)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왜 이토록 여인과 시몬은 예수님을 대하는데 태도가 천양지차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이 여인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전부를 던져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 하느니라”(47절)

세상은 부도덕한 이 여인을 가리켜 죄인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유형의 죄인이 여기 등장합니다.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입니다. 종교적 죄인입니다. 그는 교만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의롭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부도덕한 여인을 정죄했습니다. 그런 여자를 받아드리는 예수님을 경멸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자신도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반면에 여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며 용서하시는 그분의 자비로우심과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많이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나는 이 여자처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헌신과 경배와 감사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왜 예수님을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입니까? 왜 나에게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까? 왜 은혜가 말랐습니까?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 감격입니다. 은혜입니다. 반면에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감격이 없습니다. 은혜가 넘치는 곳이 천국입니다. 지옥은 그 반대입니다. 은혜가 없습니다. 은혜를 모릅니다. 거기는 발 씻을 물도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감격 때문에, 흐르는 눈물로 발을 씻을 만큼 은혜스러운 곳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정말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할 때마다 감격이 됩니까? 우리가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 유대인의 특권과 언약에 성실하신 하나님

우리는 로마서1장과 2장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율법 없는 이방인들이나 율법을 아는 유대인들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다고 여길 만한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공부하였습니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2장에서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선택 받은 민족이고, 율법을 가졌고, 할례를 행하여 왔기에 이방인들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거라는 주장합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율법을 가졌고, 할례를 행한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2장 28절과 29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참 유대인이 아니며 육체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참 할례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에 참된 변화를 받은 사람이라야 참 유대인이며 기록된 율법이 아닌 성령님에 의한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의 율법과 할례의 한계를 지적하자 여기에 대해 반론을 제기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유대인으로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선민의식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기에 이방인들 보다 더 우월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세상에는 많은 민족과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합니다. 로마인들은 강한 군대를 자랑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자랑했습니다. 중국과 인도인들은 오랜 문화와 전통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 왜 자랑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딤후 3:15-17)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성경을 의미합니다.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았으니까요.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영광이 밝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구약의 모든 말씀은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그 믿음을 가질 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진리를 깨닫고 구원을 받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사람을 구원할 수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잘못된 가치관, 그릇된 생각, 삐뜨러진 마음, 그리고 숨은 죄를 드러내어 책망합니다. 책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고쳐줍니다. 그리고 이 불의한 시대에 의로운 사람으로 훈련시켜 줍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 온전케 한다는 것은 thoroughly equipped 곧 우리를 철저히 준비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만들어 줍니다. 성경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온전히 준비시켜 줍니다.

그래서 시편 119: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시편 119:50절에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시편 119:130절에서는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한다”고 했습니다. 시편 119:160절에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보배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평생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한마디도 들어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힘을 덧입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희망을 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용기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유대인으로서는 이루 말할 나위 없이 유익합니다.

그러면 말씀을 맡았으면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4:2절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충성스럽게 말씀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적극적으로 말씀을 사랑해야 했습니다. 아직 말씀을 듣지 못한 백성들에게 힘써 말씀을 가르쳐 주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맡은 자로서 사명을 힘써 감당했다면 그들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 더 존귀하게 쓰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축복을 잘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시켜서 니느웨 백성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에 반항하여 다시스로 배를 타고 도망가다가 결국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3일 동안 회개한 후에 겨우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도 니느웨 백성들이 막상 회개하자 배가 아파서 하나님께 불평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속이 좁고 배타적이었습니다. 오직 자기들만 하나님 백성이어야 했고, 구원도 오직 자기들에게만 주어져야 했습니다. 천국문 앞에서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습니까? 아닙니다. 3,4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거짓됩니다. 사람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집회 때 그렇게 은혜 받고 믿음으로 살겠다고 결단했던 사람들 중에 조금 시간이 흘러가면 다 까먹습니다. 조그만한 유혹에 쉽사리 넘어갑니다. 이렇게 사람은 변덕스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에 불성실하여 실패하였지만 하나님은 언약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보배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자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어 구원 받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2. 죄의 합리화와 핑계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미쁘심과 참되심을 역설하자 이번에는 어떤 자들이 해괴한 질문을 던집니다. 5절, 7절, 8절입니다.

5절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7절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절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쉽게 번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불의를 행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면 우리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부당하지 않습니까?”(5절) “나의 거짓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실을 더욱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에 보탬이 된다면 왜 내가 죄인으로 단정을 받아야 합니까?”(7절)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해도 되지 않겠습니까?”(8절)

영화가 크게 흥행하려면 선한 역할을 맡은 주연 배우의 연기도 훌륭해야 하지만 악한 상대로 등장하는 조연 배우의 역할도 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악인 역할을 잘 해주어야 정의의 사도로 등장하는 주인공이 그만큼 더 빛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기를 잘하는 조연배우에게도 주연 배우에 못지 않게 후한 출연료를 주고 조연상도 받지 않습니까!

이런 맥락으로 오늘 본문에서도 억지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으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되고, 이로써 인류 구속역사가 완성되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유다도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일조를 한 것이기에 그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겠습니가?” 이것은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았기 때문에 요셉이 후에 총리가 되지 않았는가?”하는 말과 똑같습니다.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이가 “내가 신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해서 그들의 믿음이 견고하게 되었다면 나에게 죄가 없지 않는가?”라는 얼토당토않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은 “우리가 악을 더 많이 행할 수록 하나님은 선을 더 많이 행하시니 악을 더 많이 행하자”고 해괴한 주장을 합니다. 이 말은 “간증을 은혜롭게 하기 위해서 좀 더 죄를 짓고, 극적으로 회개하고 돌아와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죄를 크게 지은 것이 마치 훈장이라도 된처럼 자랑삼아 과장해서 간증하며 다니는 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오해하여 남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8b절을 보십시오.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악용하고, 자신들의 죄를 합리화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택함 받았던 유대인들이 역사 속에서 왜 그처럼 무섭게 심판을 받았는가를 기억하고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신실하심

로마서는 우리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죄를 합리화시키며 핑계를 대며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인해 우리의 구원은 결국 실패하지 않을 것을 말씀해 줍니다.

5장 1절과 2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가 도달하게 될 구원의 궁극적 목표를 보여 줍니다. (롬 5:1-2)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즉, 구원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단계, 곧 구원의 완성이요 끝인 영화의 단계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하고 완성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좌절될 수 없습니다.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완성될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8장 1절과 2절을 일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로 부터 생명을 받고 있는 까닭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최종적인 질문을 던지고 확정적인 답변을 합니다. (33-34)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십니다. 8장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에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
우리의 구원은 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위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행하시며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변함 없으심, 그분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구원을 안전하게 합니다. 확실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맙시다. 우리 죄를 합리화시키며 핑계를 대지 맙시다. 안주하거나 나태하지 맙시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삽시다. 믿음의 진보를 나타냅시다. 우리를 영광스런 자리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 모두 다시 일어나 믿음의 길로 담대히 전진해 나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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