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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종교의 실패 (04.23.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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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44회 작성일 Apr 30 2023

본문


*날짜: 2023년 4월 23일
*제목: 종교의 실패
*본문: 로마서 2: 17-29
*설교자: 이강웅 목사


본문: 로마서 2:17-29

서론: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한이 차기 까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해가 떠오는 순간부터 캄캄한 밤이 찾아올 때까지 바로의 학정 아래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애굽의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하루 종일 피라미드를 만들고,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겨우 빵 한 쪽각과 생선 한 토막을 위해서 바로가 강요하는 노역에 시달리다 등골이 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닥친 것입니다.

모든 물이 피가 되어 마실 수 없습니다. 개구리, 이, 파리 떼가 몰려 들고, 가축들이 돌림병으로 죽고, 악성 종기가 나며 우박이 내리고, 메뚜기 떼가 출몰하여 모든 곡식을 파괴합니다. 그리고 흑암이 임하고, 마지막으로 장자의 죽음이 엄습할 때 애굽은 폭삭 망했고, 바로는 두 손 들고 항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 밤중에 그들을 불러 애굽을 떠나게 합니다. 아직 발효되지 않은 떡반죽과 함께 대충 꾸린 짐을 매고 출애굽합니다. 바로 그 날이 이스라엘 달력의 원년이 되며 이스라엘 민족의 새 출발을 알리는 날입니다.
길을 떠난 그들이 홍해에 다달았을 때 바로의 전차 부대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추격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공포감심에 소리 지르며 아우성일 때 모세가 지팡이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자 놀랍게도 바닷물이 양쪽으로 갈라집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땅같이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런데 급히 추격해 오던 애굽의 전차 부대는 물이 다시 합치는 바람에 바다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은 전격적으로 구출을 받습니다.

거친 광야 길을 걸은 후 마침내 시내산에 도달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할 말씀을 주십니다. (출 19:4-6)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그들이 시내산 기슭에 섰을 때 시내산 정상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임하십니다.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임하고, 심히 큰 나팔 소리가 울러 퍼지며 지축이 흔들립니다. 그들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언약을 맺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특별한 관계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하나님께 속하였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니 오죽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바로를 섬기는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전 애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 때부터 노예였습니다. 평생 동안 남의 지시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매일 매 순간 애굽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으로 갑자기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무엇을 하라고 시키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는데 너무도 달라진 삶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 삶의 중심을 잡아주기 위해, 구체적으로 삶의 방향과 수준을 보여주기 위해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단순히 지켜야 할 규칙이 아닙니다. 이것은 잘 지킨다면 노예 시절부터 형성된 노예 정신에서 벗어나고, 충동적 삶으로 인해 어두운 세계에 빠지지 않도록 이스라엘의 울타리가 되어 보호해 줄 것입니다. 이것은 자유인으로서 그들의 삶과 공동체를 복되고 생명력이 넘치도록 가꾸어 나가기 위해 주어진 실천 지침입니다. 이로써 그들은 샬롬을 충만히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라는 그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내지 못했습니다. 제사는 열심히 드렸지만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암 5:21-24)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그들은 다른 이방인 국가와 하등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난과 고통과 비참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계명의 정신을 놓치고, 율법 조항을 지키는 것으로 자기 의를 삼고 교만해졌고, 남을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위선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 받은 믿음은 우리를 선한 일을 행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계명이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에 계명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종교생활로는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종교주의의 위험성

17-20절을 보겠습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유대인들은 자랑거리가 많았습니다. 먼저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에 대해서 안다고 자랑했습니다. 선택 받아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자랑했습니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을 인도하는 자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사실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알고, 그것을 내면화시켜 어떤 도덕적 판단과 결정을 올바르게 내리는 것 훌륭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자들을 계몽시켜 믿도록 노력하는 것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의지하여 자기 의로 삼고, 이를 자랑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도덕성과 도덕주의와의 차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잘한 일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도덕주의는 이것을 절대화시켜서 내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종교성과 종교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가르침을 받아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좋습니다. 어떤 의식을 통해 우리의 신앙심을 표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절대화시켜서 자가 의에 의지하고 자랑하는 것은 이미 종교주의에 빠진 것입니다. 종교주의란 한 마디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없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구원에 이르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자칫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습니다. 주일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합니다. 그러면 구원 받고 천국에 가는 일에 내가 뭔가를 일조한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내가 수고하고 애써서 성취한 어떤 업적, 아니면 어느 영적 경지에 도달한 것이 자기 신앙 자랑이 됩니다. 또 이것으로 내 판단의 기준을 삼고, 남을 정죄합니다. 이렇게 내 자신이 행한 신앙행위를 의지하는 순간 우리 자신도 유대인들처럼 종교주의에 빠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21절과 2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다른 사람은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들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둑질 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도둑질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말하면서 은밀하게 간음의 죄를 짓습니다.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그들이 몰래 이방 신전에 들어가서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경건한 모양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 외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수염을 길게 기르고, 까만 옷에 까만 모자를 쓰기 좋아합니다. 군인들도 철모 속에 까만 빵떡 모자를 씁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절기에 따른 지침들을 꼬박꼬박 잘 지킵니다. 정결법에 따라 부정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합니다. 이처럼 겉으로 거룩한 모양을 갖춥니다. 그런데 속은 아주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정욕적이고 위선적입니다.

오늘날 미국 금융 증권가에서 세계 경제를 쥐고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중요 무기상도 유대인들이 잡고 있습니다. 곡물상도 그렇고 언론사도 그들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믿는 경건한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상거래를 해보면 아주 철저합니다. 심지어 사회적 약자나 법으로 잘 보호 받지 못하는 계층의 사람들을 상대로 치부를 하였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철저히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동족이 아닌 이방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23-24절)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일에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고, 식사 때 기도하는 모습으로 신실한 신자의 모습의 전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무늬만 신자이지 경건의 능력이 조금도 없고, 삶에 본이 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말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본을 보이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예수님은 입으로만 양들을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로 보여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십자가에 죽기까지 100%,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히브리서 5:8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십자가는 분명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난 후에는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갈 때에 세상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세상 가운데 믿음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2. 생명력이 없는 종교주의에서 탈피하라

25절부터 바울은 할례라는 논의를 끌어 들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언약을 맺었다는 표시입니다. 유대인 남성은 언약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 꼭 통과해야 하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자신들만 선택받았다는 자기 만족적이고, 오만함의 근거가 되었고, 선민의식이 자라나는 토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가 황송하고도 감사하여 이제부터는 은혜를 입은 자답게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힘써야 하는데,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천대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올 수 있도록 다리 역할하기는 커녕 오히려 천국 문을 가로막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분들이 교회에 등록하고, 세례를 받고, 예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자신의 구원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25절부터 29절 말씀을 ‘할례’대신 다른 말로 집어넣어 읽어보면 그 의미가 명확해 집니다.

쉽게 풀어서 읽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세례 받았다는 것이 도대체 어쨌다는 말입니까?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보장해 준단 말입니까? 이런 것들은 여러분의 삶에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고, 마음에 참된 감동을 줄 때에 비로소 의미 있는 것이 됩니다. 참된 기독교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겉으로만 그리스도이라면 당신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내면이 그리스도인인 사람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적으로 세례를 받아 마음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초자연적이라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세례는 받았을 지라도 실제로 믿음 없이 사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표면적 유대인,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28절), 성령에 의한 마음의 할례(29절)”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율법을 어기는 자들이 받아 마땅한 저주를 받으며 고통 당하셨습니다. 이제 복음을 믿는 우리에게 성령님이 마음의 할례를 받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으로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결론:
요즘 시중에 나가보면 조화들이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생화와 똑같이 보입니다. 어떤 조화는 아예 향기까지 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조화는 조화입니다. 멀리서 보면 모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다 밝혀집니다. 생명력이 없는 종교는 이처럼 겉모양은 그럴 듯하지만 속은 변화 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입니다. 아니 오히려 외식과 위악이 더해짐으로써 더 교활하고 악독해 집니다.

우리는 죽은 화석과 같은 종교주의에 빠져서 거짓 믿음과 가짜 확신 가운데 거해서는 안 됩니다. 그 길에는 생명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만해져서 자기를 기준으로 남을 정죄합니다. 여기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 끝은 패망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니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성경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예수는 산상수훈 중 이 말을 하면서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해야 할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니라 ‘개독’이라는 비아냥이 나온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교회를 사유화하여 자기 아들에게 세습하고, 목회자의 성추행 사건은 단골매뮤처럼 등장하여 온갖 추태를 다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그동안 기독교 신앙을 겨우 ‘내가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 도박장에 가지 않는다’는 수준에서 자기 신앙과 의를 자랑 삼아 왔기 때문입니다. 소위 바리새인들의 소극적 경건주의에 만족했고 자만에 빠졌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움과 부요함이 없고, 지극히 빈곤함과 천박함만이 남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흑암에서 빛의 나라로, 어둠의 권세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옮겨지고, 하나님의 나라의 후사로 세움을 받는 영광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이 충만하게 우리 삶에 구현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얼마나 장엄한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지를 나타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모두 은혜 받은 자답게,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답게 그 분의 거룩한 성품에 참예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가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내면의 은밀한 죄까지 회개하는 성령님의 역사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성령의 역사에 순복하여 마음에 할례를 받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내면이 모든 불의으로 부터 깨끗케 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외면만 크리스천이 아니라 내면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나는 참된 크리스천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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