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전투의 비밀, 기도 (08.30.2026)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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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영적 전투의 비밀, 기도 (08.30.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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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4회 작성일 Aug 31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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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8월 30일
본문: 에베소서 6:18–20
제목: 영적 전투의 비밀, 기도
설교자: 이강웅 목사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언제 가장 간절히 기도합니까? 대개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입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자녀에게 어려움이 찾아오고, 아무리 생각해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모든 일이 그런대로 잘될 때에는 기도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특별히 우리 가운데 많은 분들은 미국에 와서 오랫동안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왔습니다. 낯선 땅에서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고, 일하고 사업하고 자녀를 키우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견디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안에는 “내가 해야 한다. 내가 버텨야 한다.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삶의 방식이 깊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 강인함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강점이 되었던 그 힘이 영적인 삶에서는 위험한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 “이 정도는 하나님 없이도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 정반대의 문제가 찾아옵니다. 젊었을 때에는 “내가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문제였다면, 나이가 들면서는 “이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우리를 붙잡습니다. 건강도 예전 같지 않고, 일할 힘도 줄어들며, 경제력도 약해집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나는 이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구나”라는 생각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에는 놀라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나의 능력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시선을 우리 자신에게서 하나님께 돌립니다. 영적 전쟁에서 결정적인 것은 내가 얼마나 강한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강하신가입니다.

바울은 영적 전투에 관한 말씀을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11절에서는 서기 위하여, 13절에서는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하여, 14절에서는 다시 “그런즉 서서”라고 합니다.
목적은 분명합니다. 굳게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신갑주를 모두 입힌 뒤 바울은 말씀을 끝내지 않습니다. 곧바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라고 합니다. 왜 전신갑주를 다 입힌 다음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도 자기 힘으로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전신갑주를 입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바울은 전신갑주를 설명하다가 갑자기 기도라는 새로운 주제로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전신갑주에 하나 더 보태는 일곱 번째 무기로 보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흐름은 분명합니다.

전신갑주를 입으십시오.
굳게 서십시오.
그리고 그 모든 싸움을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감당하십시오.

기도는 전투가 끝난 뒤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가 실제 전투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서 있는 방식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진리는 이미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의입니다. 구원도 하나님께서 주셨고, 말씀도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검입니다. 전신갑주를 입는다는 것은 내가 강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것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인 말씀까지 들었는데 기도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의 무장을 입고 자기 힘으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단순히 바쁘고 피곤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더 깊은 곳에는 자기 의존이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내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기도의 반대는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자기 의존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위험한 순간은 내가 약하다고 느끼는 때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없이도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영적 전투는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로 시작해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로 이어집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흐르는 한 가지 원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17절에서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라고 하고, 곧이어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말씀과 기도는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말씀 없는 기도는 내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게 만들 수 있고, 기도 없는 말씀은 성경 지식을 나의 영적 능력으로 착각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수많은 뉴스와 영상과 주장 속에서 살아갑니다. 무엇이 사실인지 분별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더 위험한 것은 내가 듣고 싶은 말을 계속 듣다가 그것을 진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의심하며 불안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앞에서 분별하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진리에 붙들어 매고,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 아래 내려놓게 합니다.
기도의 가장 큰 역사는 환경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2. 깨어 모든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라

바울은 계속해서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마귀가 언제 공격할지 몰라 두려움 속에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는 내가 한순간도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성벽 위의 파수꾼에게 위험한 순간은 적이 공격해 오는 때만이 아닙니다. 적이 없다고 생각하여 잠드는 순간입니다.

사탄의 전략도 반드시 우리를 큰 죄에 빠뜨리는 것만은 아닙니다. 모든 일이 잘될 때에는 “너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속삭일 수 있습니다. 늙고 약해졌을 때에는 정반대로 “너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속삭일 수 있습니다. 두 말은 정반대처럼 들리지만 목적은 같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에게서 우리 자신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나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고 합니다.

영적 전쟁은 개인전이 아닙니다. 에베소서는 처음부터 교회에 관한 편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로 원수 되었던 사람들을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몸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3장에서 하나님께서 바로 이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하나 됨은 단순히 사이좋게 지내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를 악한 권세 앞에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사람을 나눕니다. 정치와 이념으로 나누고, 세대와 문화로 나누며, 서로 미워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분열이 교회 안으로 그대로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상대편을 미워한다고 우리도 미워하고, 세상이 자기편만 사랑한다고 우리도 자기편만 사랑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만드신 한 몸을 어떻게 세상에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모든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라.”

여기에서 우리 자신에게 한 가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혹시 지금 내 마음속에 기도해 주기보다 미워하고 있는 성도는 없습니까? 그 사람의 얼굴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영적 전투는 먼 곳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하나님 앞에 올려놓을 수 있느냐 하는 바로 그 자리에도 영적 전투가 있습니다. 이번 한 주, 그 사람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그 사람을 붙들어 주십시오.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내가 다른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고, 내가 지쳐 쓰러질 때 다른 성도가 나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중보기도는 다른 사람의 사정을 하나님께 알려 드리는 일만이 아닙니다. 영적 전쟁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서로를 붙들어 주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기도의 범위도 넓어집니다. 처음에는 내 문제 때문에 기도하지만 점점 다른 성도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다음 세대와 복음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의 지경이 넓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바울은 놀라운 부탁을 합니다.

3. 복음의 비밀을 위해 기도하라

바울은 19절에서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가르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울입니다. 수많은 교회를 세웠고,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았으며, 영적 전투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도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말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는 여기에서 십자가 이전의 베드로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베드로는 잠들었고, 얼마 후 무너졌습니다.

바울은 “나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가르치는 바로 그 사람이 교회에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이 덜 필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지를 더 깊이 아는 사람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울의 기도 제목입니다. 그는 지금 쇠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그런데 “빨리 풀려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 환경이 편안해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가 요청한 것은 이것입니다.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복음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입니다. 원수 되었던 사람들이 십자가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백성을 만드셨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자신의 안전보다 복음의 전진에 있었습니다. 영적 전투의 목적은 단순히 내가 시험에 들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굳게 선다는 것은 어떤 형편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복음이 계속 전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놀라운 말로 표현합니다. “쇠사슬에 매인 사신.”

사신은 왕의 권위를 가지고 파송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신의 손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모순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쇠사슬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자신을 보냈느냐가 중요했습니다.

로마는 그의 몸을 묶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활동을 제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그의 주인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죄수이기 전에 왕이신 그리스도의 사신이었습니다.
쇠사슬은 그의 활동을 제한했지만 그의 소명을 취소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나이가 우리의 활동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질병이 우리의 몸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경제력이 줄어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속에 “이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 질문만 붙들고 있으면 나이를 계산하게 됩니다. 건강을 계산하고 가진 것을 계산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러나 바울을 보십시오.
그의 손에는 쇠사슬이 있었습니다.
그의 몸은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묶여 있지 않습니다.

기도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우리의 시선을 돌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늙고 병들고 경제력이 약해졌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퇴역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와 손주들의 믿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전진하도록 기도할 수 있습니다.

몸의 활동 반경은 좁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지경까지 좁아질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더 넓어질 수 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서라. 굳게 서라.” 그런데 전신갑주를 모두 입힌 뒤 마지막에 우리를 어디로 데려갑니까?
무릎으로 데려갑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우리는 무릎을 꿇음으로 굳게 섭니다.

에베소서의 처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든 통치와 권세 위에 높이셨습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왕은 이미 승리하신 왕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승리를 만들어 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서는 싸움입니다.

젊을 때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의 질문을 바꾸어 놓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입니다.

우리에게도 각자의 쇠사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이일 수도 있고, 질병일 수도 있습니다. 은퇴와 연약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때 바울을 기억하십시오.
쇠사슬은 그의 손을 묶었지만 그의 소명을 묶지는 못했습니다.
바울은 쇠사슬이 풀린 뒤에 사신이 된 것이 아닙니다. 쇠사슬에 매인 바로 그 자리에서 왕의 사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으로 무릎을 꿇을 수 없다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기도할 수 있다면 아직 사명이 남아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보냄 받은 왕의 사신입니다.

그러므로 전신갑주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무릎을 꿇으십시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왕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 무릎으로 굳게 서십시오.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쇠사슬에 매인 바로 그 자리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왕이 보내신 사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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