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05.0.3 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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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5회 작성일 May 04 2026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5월 3일
본문: 신명기 6:1-9
제목: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성도 여러분, 만물이 생동하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와 손주들을 바라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소원을 품고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든든한 경제적 토대나 남부럽지 않은 교육 환경을 선물해주고 싶어 밤낮으로 애를 씁니다. 그런데 미국의 억만장자였던 앤드류 카네기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자녀에게 막대한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그들을 망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부모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정신적 가치다.”
하지만 우리 믿음의 부모들에게는 카네기가 말한 ‘정신적 가치’를 넘어, 영적 생존을 결정짓는 더 본질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당장 세상을 떠난다면, 내 자녀의 영혼 속에 무엇을 남겨주고 갈 것인가?” 오늘날 많은 부모가 자녀의 장래를 위해 걱정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자녀들에게 ‘스펙’을 쌓아주고, 재물을 물려주는 데는 진심이지만 그들의 영혼이 가나안의 세속 문화에 의해 잠식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둔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런 시대에 전혀 다른 유산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특징을 단 하나의 단어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사랑(Agape)’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을 단순히 '소유'하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사랑이라고 선언합니다(요일 4:8).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의 원본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이며, 이 거칠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우리 가정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펼친 신명기(Deuteronomy)는 그 이름의 뜻처럼 '율법의 반복', 즉 '되새김질하는 말씀'입니다.
광야 40년을 지나 이제 막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다음 세대들에게, 노(老) 지도자 모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설교를 전합니다.
"얘들아, 이제 너희가 들어갈 가나안은 화려하지만 공허한 우상 숭배와 세속 문화가 가득할 거야. 그곳에서 너희가 길을 잃지 않고 살 유일한 길은, 오직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는 것뿐이란다."
I. 생명의 길 (1-3절)
본문 1절에서 모세가 선포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는 결코 우리를 얽매는 족쇄가 아닙니다. 이것은 가나안이라는 낯설고 거친 세상, 오늘날로 치면 치열한 생존 경쟁와 허영심과 비교 의식이 가득한 세상 속으로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생명의 지침서, 곧 인생의 내비게이션입니다.
길을 모르는 초행길에서 내비게이션이 생명이듯,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자녀의 인생이 길을 잃지 않도록 인도하는 가장 정확한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까? 단순히 ‘명령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돈, 성공, 권력이 우리 삶의 기준이라고 끊임없이 유혹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사라질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변하지 않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만 살아 있듯이, 인간은 하나님께 연결될 때만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순종이란 억지로 따르는 ‘고역’이 아니라, 살기 위해 생명줄을 붙잡는 가장 ‘본질적인 선택’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연결되어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 삶에는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2절과 3절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네 날이 장구하게 되고, 복을 얻으며, 크게 번성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복과 번성은 단순한 물질적 증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삶의 방향이 바로 서고, 어떤 위기에도 마음이 흔들리거나 분열되지 않는 거룩한 질서와 평안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참된 복은 세상의 트렌드를 따라가는 데 있지 않고, 창조주의 원리에 우리 삶의 주파수를 맞추는 데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기 방식대로 살겠다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자유로운 점프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결국 생명을 잃는 길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방향을 잃은 삶,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에게 주신 이 말씀은 단순한 종교적 규칙이 아닙니다. 가정을 지키고 대대로 번성하게 하는 언약의 길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붙들고 순종할 때, 우리의 삶과 가정은 가장 든든한 반석 위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수많은 가짜 기준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연결하십시오. 말씀을 따라 사는 그 단순한 순종 속에, 장구한 생명과 참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2. 여호와를 사랑하라 (4-5절)
이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을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쉐마)!” 이 말씀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닙니다. 생명을 걸고 들어야 할 언약의 선언입니다. 4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 곧 우리와 인격적으로 관계 맺으시는 분이십니다. 멀리 떨어진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흐르려면 먼저 “우리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둘째, 그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돈, 성공, 자녀의 성취, 사회적 지위라는 수많은 ‘사랑의 대상’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유일하다.” 이 선언은 우리 삶의 중심이 나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가짜이고 허상이며 일시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참된 실재입니다. 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생길 때, 우리는 방황하게 되고, 가정의 질서는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첫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마음을 다하여: 나뉘지 않은 중심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 뜻(영혼)을 다하여: 생명 전체를 걸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 힘을 다하여: 우리의 모든 에너지와 삶의 자원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다하여’ 사랑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선포합니다. 그 사랑의 결정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독생자를 죽기까지 내어주신 그 무조건적인 사랑(롬 5:8)이 우리 마음에 부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전심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요즘 흥미로운 사례를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 미국 전역은 BTS(방탄소년단)의 열기로 뜨겁습니다. 그 팬덤인 ‘아미(ARMY)’의 열정과 헌신은 실로 놀랍습니다. 몇시간 운전은 기본이고,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습니다. 그들이 목놓아‘아리랑’을 열창하는 장면을 볼 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와, 세상에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하고 감동할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아티스트를 향해 전적인 사랑을 보냅니다. 한글을 배워 아티스트의 노래에 담긴 메시지를 공부하고, 아티스트의 철학을 삶의 가치로 삼으며,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기꺼이 쏟아붓습니다.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의무가 아니라, 그들이 받은 위로와 감동에 반응하는 자발적인 ‘전심’입니다.
세상의 가수를 향한 팬들의 사랑도 이토록 뜨겁고 헌신적이라면, 하물며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들이 아티스트에게 열광하듯, 우리 역시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반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질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했을 때는 지혜와 평안을 누렸으나, 마음이 유혹들로 인해 나뉘기 시작했을 때 결국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의 달에 우리가 자녀들에게 남겨야 할 가장 큰 유산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부모의 모습입니다. 부모가 십자가 은혜에 감격하여 예배 드리는 그 ‘진심’을 보여줄 때, 그 사랑은 자녀의 영혼에 자연스럽게 스며듭니다.
“하나님, 제 마음을 온전히 드립니다.” 이 고백이 회복될 때, 여러분의 가정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3.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 (6-9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어떻게 우리의 자녀와 손주에게 전달됩니까? 사랑은 ‘말씀 교육’을 통해 삶으로 전수되는 것을 6절부터 9절이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먼저 6절은 모든 교육의 출발점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자녀 교육 이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부모 자신의 마음에 말씀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아는’ 것과 ‘새기는’ 것은 다릅니다. 새긴다는 것은 말씀이 나의 생각과 감정과 선택을 지배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부모의 마음에 살아 있지 않은 말씀은 결코 자녀의 삶에 뿌리내릴 수 없습니다. 신앙 교육은 지식 전달이 아니라 ‘삶을 통한 전염’익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새겨진 말씀은 7절에서 구체적인 일상으로 이어집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여기서 하나님은 특별한 교육 시간을 정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삶의 모든 순간을 교실로 바꾸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우리의 식탁은 어떻습니까? “숙제했니? 성적은 어떠니?”라는 심문과 잔소리만 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정은 단순한 생활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살아 있는 교실이어야 합니다. 밥을 먹으며 감사의 이유를 나누고, 길을 걸으며 창조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잠들기 전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자녀의 손목을 잡고 말씀으로 축복해 주십시오. 이 작은 일상의 반복이 자녀의 영혼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토양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8절과 9절은 이 말씀 교육의 범위를 더욱 확장합니다. “손목에 매며 미간에 붙이고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
이 말씀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 손목은 행동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행동과 습관이 말씀의 지배를 받게 하라는 것입니다.
• 미간(이마)은 생각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이 말씀의 안경을 쓰게 하라는 것입니다.
• 문설주는 가정의 출입, 곧 삶의 경계를 의미합니다. 우리 가정의 문화 전체가 세상이 아닌 말씀의 기준 아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스마트폰과 SNS를 통해 끊임없이 성공, 외모, 비교라는 가짜 기준을 주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정의 기준을 말씀 위에 세워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는 부모의 말을 듣기보다 부모의 삶을 봅니다. 우리 입술에서는 세상의 이야기가 넘쳐나면서, 정작 하나님의 말씀에는 침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가정의 첫 번째 목자로 부르셨습니다. 여기에는 완벽한 신학 지식을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말씀을 사랑하고, 그것을 일상에서 나누는 ‘진실한 모습’을 원하십니다.
결론:
광야 40년의 거친 세월을 지나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둔 그 운명의 순간, 모세가 다음 세대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더 강해져라”도, “더 많이 정복하라”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였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전심으로 사랑하라!”
우리가 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옵니까? 바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볼 때 생겨납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나를 먼저 찾아오신 그 ‘지독한 사랑’을 숙고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떠난 세상적 풍요는 결국 공허로 끝날 허상이지만, 십자가 사랑에 뿌리내린 인생은 세상을 이기는 진실이 됩니다. 우리가 그 사랑에 감격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 영혼은 제자리를 찾고 우리 인생은 어떤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가정의 달을 보내며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어봅시다. “나는 오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며, 그 사랑을 내 자녀에게 유산으로 남기고 있습니까?”
신앙은 말로 전수되지 않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등’을 보고 배웁니다. 힘겨운 순간에 세상 방법을 찾지 않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무릎 꿇는 부모의 뒷모습에서, 자녀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배웁니다. 신앙 전수는 거창한 교육이 아니라, 우리 가정의 공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채우는 일입니다.
이번 한 주, 세상의 소음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에 더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염려의 탄식보다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자녀의 귓가에 흘려보내십시오.
그 사랑이 여러분의 가문을 대대로 이어지는 믿음의 가문으로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장구한 복’이,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 위에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날짜: 2026년 5월 3일
본문: 신명기 6:1-9
제목: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성도 여러분, 만물이 생동하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와 손주들을 바라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소원을 품고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든든한 경제적 토대나 남부럽지 않은 교육 환경을 선물해주고 싶어 밤낮으로 애를 씁니다. 그런데 미국의 억만장자였던 앤드류 카네기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자녀에게 막대한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그들을 망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부모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정신적 가치다.”
하지만 우리 믿음의 부모들에게는 카네기가 말한 ‘정신적 가치’를 넘어, 영적 생존을 결정짓는 더 본질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당장 세상을 떠난다면, 내 자녀의 영혼 속에 무엇을 남겨주고 갈 것인가?” 오늘날 많은 부모가 자녀의 장래를 위해 걱정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자녀들에게 ‘스펙’을 쌓아주고, 재물을 물려주는 데는 진심이지만 그들의 영혼이 가나안의 세속 문화에 의해 잠식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둔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런 시대에 전혀 다른 유산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특징을 단 하나의 단어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사랑(Agape)’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을 단순히 '소유'하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사랑이라고 선언합니다(요일 4:8).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의 원본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이며, 이 거칠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우리 가정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펼친 신명기(Deuteronomy)는 그 이름의 뜻처럼 '율법의 반복', 즉 '되새김질하는 말씀'입니다.
광야 40년을 지나 이제 막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다음 세대들에게, 노(老) 지도자 모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설교를 전합니다.
"얘들아, 이제 너희가 들어갈 가나안은 화려하지만 공허한 우상 숭배와 세속 문화가 가득할 거야. 그곳에서 너희가 길을 잃지 않고 살 유일한 길은, 오직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는 것뿐이란다."
I. 생명의 길 (1-3절)
본문 1절에서 모세가 선포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는 결코 우리를 얽매는 족쇄가 아닙니다. 이것은 가나안이라는 낯설고 거친 세상, 오늘날로 치면 치열한 생존 경쟁와 허영심과 비교 의식이 가득한 세상 속으로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생명의 지침서, 곧 인생의 내비게이션입니다.
길을 모르는 초행길에서 내비게이션이 생명이듯,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자녀의 인생이 길을 잃지 않도록 인도하는 가장 정확한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까? 단순히 ‘명령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돈, 성공, 권력이 우리 삶의 기준이라고 끊임없이 유혹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사라질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변하지 않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만 살아 있듯이, 인간은 하나님께 연결될 때만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순종이란 억지로 따르는 ‘고역’이 아니라, 살기 위해 생명줄을 붙잡는 가장 ‘본질적인 선택’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연결되어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 삶에는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2절과 3절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네 날이 장구하게 되고, 복을 얻으며, 크게 번성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복과 번성은 단순한 물질적 증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삶의 방향이 바로 서고, 어떤 위기에도 마음이 흔들리거나 분열되지 않는 거룩한 질서와 평안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참된 복은 세상의 트렌드를 따라가는 데 있지 않고, 창조주의 원리에 우리 삶의 주파수를 맞추는 데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기 방식대로 살겠다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자유로운 점프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결국 생명을 잃는 길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방향을 잃은 삶,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에게 주신 이 말씀은 단순한 종교적 규칙이 아닙니다. 가정을 지키고 대대로 번성하게 하는 언약의 길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붙들고 순종할 때, 우리의 삶과 가정은 가장 든든한 반석 위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수많은 가짜 기준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연결하십시오. 말씀을 따라 사는 그 단순한 순종 속에, 장구한 생명과 참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2. 여호와를 사랑하라 (4-5절)
이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을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쉐마)!” 이 말씀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닙니다. 생명을 걸고 들어야 할 언약의 선언입니다. 4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 곧 우리와 인격적으로 관계 맺으시는 분이십니다. 멀리 떨어진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흐르려면 먼저 “우리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둘째, 그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돈, 성공, 자녀의 성취, 사회적 지위라는 수많은 ‘사랑의 대상’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유일하다.” 이 선언은 우리 삶의 중심이 나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가짜이고 허상이며 일시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참된 실재입니다. 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생길 때, 우리는 방황하게 되고, 가정의 질서는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첫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마음을 다하여: 나뉘지 않은 중심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 뜻(영혼)을 다하여: 생명 전체를 걸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 힘을 다하여: 우리의 모든 에너지와 삶의 자원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다하여’ 사랑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선포합니다. 그 사랑의 결정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독생자를 죽기까지 내어주신 그 무조건적인 사랑(롬 5:8)이 우리 마음에 부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전심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요즘 흥미로운 사례를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 미국 전역은 BTS(방탄소년단)의 열기로 뜨겁습니다. 그 팬덤인 ‘아미(ARMY)’의 열정과 헌신은 실로 놀랍습니다. 몇시간 운전은 기본이고,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습니다. 그들이 목놓아‘아리랑’을 열창하는 장면을 볼 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와, 세상에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하고 감동할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아티스트를 향해 전적인 사랑을 보냅니다. 한글을 배워 아티스트의 노래에 담긴 메시지를 공부하고, 아티스트의 철학을 삶의 가치로 삼으며,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기꺼이 쏟아붓습니다.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의무가 아니라, 그들이 받은 위로와 감동에 반응하는 자발적인 ‘전심’입니다.
세상의 가수를 향한 팬들의 사랑도 이토록 뜨겁고 헌신적이라면, 하물며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들이 아티스트에게 열광하듯, 우리 역시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반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질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했을 때는 지혜와 평안을 누렸으나, 마음이 유혹들로 인해 나뉘기 시작했을 때 결국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의 달에 우리가 자녀들에게 남겨야 할 가장 큰 유산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부모의 모습입니다. 부모가 십자가 은혜에 감격하여 예배 드리는 그 ‘진심’을 보여줄 때, 그 사랑은 자녀의 영혼에 자연스럽게 스며듭니다.
“하나님, 제 마음을 온전히 드립니다.” 이 고백이 회복될 때, 여러분의 가정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3.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 (6-9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어떻게 우리의 자녀와 손주에게 전달됩니까? 사랑은 ‘말씀 교육’을 통해 삶으로 전수되는 것을 6절부터 9절이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먼저 6절은 모든 교육의 출발점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자녀 교육 이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부모 자신의 마음에 말씀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아는’ 것과 ‘새기는’ 것은 다릅니다. 새긴다는 것은 말씀이 나의 생각과 감정과 선택을 지배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부모의 마음에 살아 있지 않은 말씀은 결코 자녀의 삶에 뿌리내릴 수 없습니다. 신앙 교육은 지식 전달이 아니라 ‘삶을 통한 전염’익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새겨진 말씀은 7절에서 구체적인 일상으로 이어집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여기서 하나님은 특별한 교육 시간을 정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삶의 모든 순간을 교실로 바꾸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우리의 식탁은 어떻습니까? “숙제했니? 성적은 어떠니?”라는 심문과 잔소리만 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정은 단순한 생활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살아 있는 교실이어야 합니다. 밥을 먹으며 감사의 이유를 나누고, 길을 걸으며 창조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잠들기 전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자녀의 손목을 잡고 말씀으로 축복해 주십시오. 이 작은 일상의 반복이 자녀의 영혼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토양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8절과 9절은 이 말씀 교육의 범위를 더욱 확장합니다. “손목에 매며 미간에 붙이고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
이 말씀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 손목은 행동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행동과 습관이 말씀의 지배를 받게 하라는 것입니다.
• 미간(이마)은 생각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이 말씀의 안경을 쓰게 하라는 것입니다.
• 문설주는 가정의 출입, 곧 삶의 경계를 의미합니다. 우리 가정의 문화 전체가 세상이 아닌 말씀의 기준 아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스마트폰과 SNS를 통해 끊임없이 성공, 외모, 비교라는 가짜 기준을 주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정의 기준을 말씀 위에 세워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는 부모의 말을 듣기보다 부모의 삶을 봅니다. 우리 입술에서는 세상의 이야기가 넘쳐나면서, 정작 하나님의 말씀에는 침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가정의 첫 번째 목자로 부르셨습니다. 여기에는 완벽한 신학 지식을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말씀을 사랑하고, 그것을 일상에서 나누는 ‘진실한 모습’을 원하십니다.
결론:
광야 40년의 거친 세월을 지나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둔 그 운명의 순간, 모세가 다음 세대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더 강해져라”도, “더 많이 정복하라”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였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전심으로 사랑하라!”
우리가 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옵니까? 바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볼 때 생겨납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나를 먼저 찾아오신 그 ‘지독한 사랑’을 숙고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떠난 세상적 풍요는 결국 공허로 끝날 허상이지만, 십자가 사랑에 뿌리내린 인생은 세상을 이기는 진실이 됩니다. 우리가 그 사랑에 감격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 영혼은 제자리를 찾고 우리 인생은 어떤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가정의 달을 보내며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어봅시다. “나는 오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며, 그 사랑을 내 자녀에게 유산으로 남기고 있습니까?”
신앙은 말로 전수되지 않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등’을 보고 배웁니다. 힘겨운 순간에 세상 방법을 찾지 않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무릎 꿇는 부모의 뒷모습에서, 자녀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배웁니다. 신앙 전수는 거창한 교육이 아니라, 우리 가정의 공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채우는 일입니다.
이번 한 주, 세상의 소음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에 더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염려의 탄식보다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자녀의 귓가에 흘려보내십시오.
그 사랑이 여러분의 가문을 대대로 이어지는 믿음의 가문으로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장구한 복’이,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 위에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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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Oi7FXrM5kr8 25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