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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죽음을 이기는 권세 (04.26.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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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1회 작성일 Apr 2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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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4월 26일
본문: 마태복음 9:18-26
제목: 죽음을 이기는 권세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여기서 1번 하이웨이를 타고 남쪽으로 네 시간 정도 쭉 달리다보면 왼쪽 산꼭대기 위에 허스트 캐슬(Hearst Castle)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집을 지은 윌리암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는 당대 최고 부자였습니다. 금으로 치장된 수영장, 유럽에서 통째로 옮겨온 조각상들, 그리고 멀리 내려다보이는 바다에 파도가 하얗게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60세가 되던 해, 가족과 지인들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립니다. “앞으로 내 앞에서는 농담이라도 ‘죽음’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마라!” 왜 그랬을까요? 그 화려한 성안에도 그를 찾아오는 죽음의 발자국 소리를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날에는 죽음은 허스트씨처럼 두려워 피해야 할 ‘재앙’이나 갑작스러운 ‘사고’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의학의 발전과 영양 공급의 개선으로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장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늘어난 수명 덕분에 사람들은 죽음을 차분히 준비할 시간적 여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예상치 못한 숙제도 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노화와 병고라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한다는 것입니다. 병상에서 혹시 가족에게 짐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노화와 병고의 고통을 견뎌야 합니다. 자녀들은 바쁘고 세상은 각박해져 가니, 홀로 남겨지는 ‘고독사’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노년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기도 합니다.

이제 죽음은 단순히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 어떻게 잘 매듭지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인생의 마지막 과업’이 되었습니다. 미국 의학 잡지의 편집자였던 펠릭스 마티 이바네즈 박사는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는 임종 과정의 육체적 고통, 둘째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단절과 소외, 셋째는 죽음 이후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죽음을 입 밖에도 내지 못하게 했던 허스트는 임종의 순간 극심한 공포 속에서 몸부림치며 떠났지만,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는 매일 아침 신하들에게 “폐하, 죽음을 기억하십시오”라고 인사하게 했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죽음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대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본래 하나님의 창조 계획 속에 죽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들어왔고, 그 결과로 죽음이 임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단지 육신의 생명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었기에 우리는 시간과 능력에 제한을 받게 되었고, 늙고 병들며 고통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질병과 노쇠, 악과 불의, 미움과 증오, 시기와 질투, 가난과 빈곤, 압제와 폭력과 같은 모든 고난은 바로 우리가 ‘죽음의 권세’ 아래 놓여 있다는 증세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의 지배 아래서 모든 인생은 결국 절망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기독교를 생명의 종교라고 말하는 이유는 죽음으로 우리 인생이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신앙생활이란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어 그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늙고 병들었다고 해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라는 고백처럼, 육신은 쇠하여도 영적 생명력은 더욱 싱싱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힘은 이 죽음이라는 현실을 정직하게 대면하게 하고, 그것을 극복할 권세를 우리에게 부어주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를 얽어매는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참된 생명의 소망을 발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절망의 끝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다

오늘 본문은 우리 인생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시련, 바로 ‘죽음’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선 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께서 이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8절을 함께 읽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여기 등장하는 ‘관리’는 당시 유대 사회의 지도층인 ‘회당장’인 야이로입니다. 그에게는 열두 살 된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자식을 키워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들 녀석들의 든든함도 좋지만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고 살갑게 웃어주는 딸의 재롱은 고된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는 비타민과 같습니다. 이렇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소중한 외동딸이었는데 그만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죽은 딸을 붙들고 통곡하며 “하나님, 차라리 나를 데려가시지 왜 이 어린 생명을 데려가십니까!” 원망하며 털썩 주저앉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이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달렸습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옷자락이 흩날리도록, 체면도, 직위도, 고상한 품위도 다 내던졌습니다.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예수께로 나아가 그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고 간구합니다. 기도가 아니라 절규입니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절벽 앞에서 터져 나온 마지막 외침입니다.

이 간구 속에는 비록 숨은 멎었지만, 주님이 손을 얹기만 하신다면 죽음의 권세도 물러갈 것이라는 절박하고도 위대한 믿음의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합니다. 서둘러 가는 길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발걸음을 멈추십니다. 그 여인의 사연을 듣습니다. 이때 야이로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입니다. ‘주님, 지금 이게 중요합니까? 내 딸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서 예수님은 야이로의 믿음을 더 깊은 자리로 이끄십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한층 더 성장시키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빨리 응답하실 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멈추신 것처럼 보일 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장례 절차가 시작되어 피리 부는 자들과 곡하는 무리가 가득했습니다. 이미 ‘확정된 죽음’에 대한 통곡 소리로 집 안은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이에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그들의 비웃음 속에 이런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라도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 아무 소용없어. 죽음 앞에서 당신이 뭘 할 수 있겠어?”

오늘 우리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도 이와 같습니다.
“이제 늦었다”, “이제 끝이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
그 순간, 야이로는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말인가, 주님의 말씀인가. 여러분이라면 무엇을 붙드시겠습니까? 믿음은 항상 선택의 기로에서 결정됩니다.

2. 죽음과 ‘잠’: 내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시선

이렇게 모두가 죽음을 확신하고 절망의 통곡을 터뜨릴 때, 예수님은 그 한계 상황 앞에서 전혀 다른 선언을 하십니다.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의아해했을 것입니다. 이미 숨이 멎고 몸이 차갑게 식은 소녀를 두고 ‘자고 있다’니, 현실을 모르는 소리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죽음은 영원한 ‘마침표’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인식과 경험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죽음 그 너머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종 내가 아는 세계가 전부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내가 경험한 것, 내가 배운 지식 안에서만 판단하기 때문에 그만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틀에 갇히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이 틀을 깨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환경이 좋고 몸이 건강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고백하다가도, 막상 질병이 찾아오고 삶이 고달파지면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나 보다”라며 낙심하곤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경험의 한계를 뛰어넘어 창조주 하나님의 시선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아는 좁은 세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내 상상과 이성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분입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통곡하는 무리와 전혀 다른 차원을 보고 계셨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방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사람들은 다 나가고, 조용해집니다.
정적이 흐릅니다.
예수님이 그 소녀의 손을 잡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 순간,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이해가 됩니다. 주님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밤에 잠들 때 ‘이제 끝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듯이,
하나님은 죽음을 ‘아침이 있는 밤’으로 보십니다.

아마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도 당시에는 ‘잔다’는 말씀의 깊은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주님이 부활하신 뒤에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잠시 자다가 다시 깨어나는 부활로 가는 통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황혼기에 서서 몸이 예전 같지 않고 죽음의 그림자가 가깝게 느껴질 때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십시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세상은 우리 노년의 쇠약함과 죽음을 보며 끝이라고 말하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가 잠시 뒤에 깨어나 영광의 아침을 맞이할 ‘잠’을 자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오늘 하루를 생명력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생명의 주관자 되신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부활과 생명의 주 –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신 승리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방금 숨을 거둔 열두 살 소녀를 마치 산 자를 잠에서 깨우듯이 가볍게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성경은 주님의 이 권세를 반복해서 증언합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는 상여에 실려 나가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향해 “청년아, 일어나라” 명하시며 살려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외치셨을 때 죽은 나사로가 베로 동인 채 나왔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서가 왜 이런 사건들을 이토록 자세히 기록하고 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단순히 병을 잘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죽음을 이기는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죽은 자를 산 자처럼 명하시는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이 말씀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으시는 현장을 지켰고, 비어있는 무덤을 직접 확인했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대면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증언은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생생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인류 최후의 원수인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무너뜨리셨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과 15절은 주님이 오신 목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 이후에 마주할 심판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이 ‘죽음의 공포’를 무기로 우리를 평생 종노릇하게 만듭니다. 나이가 들수록 몸이 아플 때마다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찾아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똑같은 피와 살을 입고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이 죽음을 뚫고 부활하심으로, 이제 우리는 그 공포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성도의 장례식장에서 눈물 너머로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육신은 낡아지고 잠시 잠드는 것 같으나,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우리는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깨어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추수 때 첫 열매를 거두면 나머지 열매들도 곧 거두게 될 것을 아는 것처럼, 첫 열매이신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우리가 맞이할 부활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 그날이 오면, 긴 병마로 지친 우리의 육신과 세월에 패인 우리의 연약한 몸은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몸으로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잠’이라 부릅니다. 잠든 아이가 아침에 어머니의 목소리에 눈을 뜨듯, 우리도 주님의 음성에 눈을 떠 영광의 아침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좁고 답답한 누에고치를 뚫고 나온 나비가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것처럼, 우리 또한 죽음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새로운 차원의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던 병고도, 이별의 슬픔도, 외로운 눈물도,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죽어도 살겠고,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 약속은 병고와 노화로 지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위로입니다. 수명이 늘어난 이 시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걱정하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영원히 살 것인가’를 확신하며 당당하게 걸어갑시다.

결론: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주시고, 유지시키며 붙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으로 충만하시기에, 그분의 가장 위대한 사랑의 표현은 언제나 우리에게 ‘생명’을 부어주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부어주시면 메마른 광야에 꽃이 피듯 만물이 살아납니다. 그 거대한 생명의 물결 앞에는 죽음조차 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던 예수님을 보십시오. 세상은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삼 일 만에 그분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이 진실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권능으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행 17:31, 엡 1:20) 차디찬 무덤의 돌문도, 로마의 군사들도, 시퍼런 죽음의 권세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망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승리가 바로 저와 여러분의 것입니다. 우리 또한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하나님의 생명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안에도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저절로 ‘아이고’소리가 나오며 온 몸의 통증 때문에 고통스럽습니까? 약 봉지에 늘어나는 약들 때문에 서러우십니까? 거울 속에 비췬 내 모습이 무척 낯설게 느껴지십니까? 이럴 때 ‘이제 나도 다 살았다’ 싶으시지요.

그러나 아닙니다. 세상은 그것을 ‘쇠퇴’라고 부르지만, 우리 주님은 그것을 ‘영광의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잠자리에 드는 준비’라고 부르십니다. 잠든 아이를 깨우는 어머니의 손길처럼, 주님은 머지않아 우리의 손을 잡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애야, 이제 일어나거라. 밝은 아침이 왔단다.”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주님이 손을 얹어 주시면 나는 영원히 살겠습니다”라는 이 당당한 안목으로 죽음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인생의 쇠약함 너머에 있는 찬란한 천국 잔치를 소망하십시오. 죽음을 이기는 주님의 권세와 평강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삶과 임종의 그 순간까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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