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할 수 없는 사랑 (05.11.20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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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73회 작성일 May 12 2025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5년 5월 11일
본문: 호세아 11:1-9
제목: 포기할 수 없는 사랑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어버이의 주일을 맞이하여 이 자리에 함께하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이 가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함께 나눌 이야기는 ‘포기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 주제를 묵상하면서 문득 예전에 소개하였던 한 편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서강대 영문과 교수였던 고(故) 장영희 씨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병상에서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소아마비로 불편한 몸이었던 딸을 위해 어머니 이길자 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매일 업고 학교를 오갔습니다. 눈 오는 날 새벽에는 연탄재를 뿌려 딸의 길을 만들었고, 수업 중에도 딸의 화장실 문제를 위해 교실을 드나들어야 했습니다. 장 교수는 어머니를 “운명처럼, 십자가처럼 나를 업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 한마디 역시 “엄마”였습니다. 장애라는 현실 앞에서 수많은 편견과 싸워야 했던 그녀에게 ‘엄마’는 두 다리였고, 오른팔이었으며, 삶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한 존재였습니다.
‘엄마’라는 단어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유대인의 속담처럼 ‘하나님이 모든 곳에 다 있을 수 없어서 대신 엄마를 만들었다’는 말은, 어머니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 웅변적으로 보여줍니다.
물론, 장 교수님의 어머니처럼 모든 어머니가 이상적인 모습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때로는 부족했고,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머니 역시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하고, 희생하고, 봉사했던 우리 어머니께 오히려 “미안하다”는 말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조차도 어머니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다가, 그 자리가 비었을 때 비로소 삶의 커다란 공백을 느끼고, 그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가족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뼈를 깎는 아픔과 고통일지라도, 무한한 인내로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시인 심순덕 씨의 시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과, 그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녀의 모습을 너무나도 잘 그려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도 한때는 부모에게 사랑 받는 딸이었고, 꿈 많던 소녀였으며, 사랑 받는 아내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머니를 처음부터 어머니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그 사랑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감사하다고 말한 게 언제입니까? 혹시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그래도 되는 줄 아는’존재가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바쁜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는 메시지 하나 보내는 것조차 어려워하고, 가족 단톡방의 메시지를 읽지 않은 채 넘어가기도 합니다.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를 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지만, 우리 어머니의 사랑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 사랑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붓기 전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알아주지 않는다고 야속해하지 않으시고, 이미 베푸신 사랑은 잊은 채, 앞으로 더 주어야 할 사랑만을 생각하시며 “더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내가 죄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십니다.
이런 어머니를 통해 진짜 사랑을 어느 정도 맛보신 분이라면, 자신이 특별한 축복을 받은 사람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는 분이라 할지라도 크게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찐한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그 사랑입니다.
1. 포기하지 않는 사랑
신구약성서 66권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메시지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결코 다함이 없는 사랑,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내어주고도 “더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 사랑,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이 당연시하고, 무시하고, 외면하고, 배반할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그 완벽한 사랑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많은 어머니들이 보여 준 사랑은 이 하나님 사랑의 모방품인 셈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구약성서의 호세아서입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호세아에게 차마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을 내리십니다. 평판이 좋지 않은 여인, 성매매를 하는 여인, 혹은 성 중독에 빠진 여인과 결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경건하게 살기를 원했던 호세아에게 부정한 결혼을 하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그러나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멜과 결혼하고 세 자녀를 낳습니다. 고멜은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듯했지만, 결국 과거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가출해 홍등가로 돌아갑니다.
호세아는 절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제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다시 한번 명령하십니다. 홍등가로 가서 그 여인을 다시 찾아오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은혜를 배반한 아내를 다시 데려와 사랑하라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지만 호세아는 순종합니다. 그는 적지 않은 몸값을 지불하고 부정한 아내를 다시 집으로 데려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어려운 명령을 호세아에게 반복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아무리 말해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파격적으로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랑을 얼마나 자주 당연시하고, 무시하고, 배반했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그 철없는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으셨는지를 호세아의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을 통해서 보여주려 하셨던 것입니다.
2. 붙붙는 사랑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호세아 11장 말씀은 마치 자녀를 향한 부모의 애끓는 사랑처럼, 끊임없이 배반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1절: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부터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갓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고 사랑하듯,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애굽의 속박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2절: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의 부르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이는 마치 자녀가 부모의 사랑과 기대를 저버리고 오히려 엇나가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3절: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찌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은 마치 어머니가 아이의 첫걸음을 돕듯, 이스라엘의 성장 과정을 친히 인도하시고 보호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또한 부모님의 희생과 헌신,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았습니까?
4절: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사랑의 줄’이라는 표현은 강압적인 힘이 아닌, 부드러운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멍에를 벗기시고 먹을 것을 주신 것은 그들에게 자유를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냅니다. 이는 어머니가 자녀를 희생적으로 돌보는 사랑과 닮아 있습니다.
5-7절: “저희가 애굽 땅으로 다시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찌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그로 인한 심판의 경고를 담고 있지만, 그 심판조차 하나님의 궁극적인 사랑의 계획 안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미워서가 아니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함인 것처럼, 하나님의 징계 또한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8-9절: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애끓는 심정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멸망한 도시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처럼 멸망하도록 이스라엘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라는 표현은 끊임없이 배반하는 백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고뇌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내적 갈등을 보여줍니다. 이어서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는 말씀은 그러한 갈등 속에서도 결국 진노를 압도적으로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변덕스럽고 조건적인 인간의 사랑과는 달리, 당신의 거룩하고 신실한 본성 때문에 결코 우리를 완전히 버릴 수 없다는 강력한 사랑의 선언입니다.
이 얼마나 눈물겨운 사랑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변덕, 우리의 배신,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삶을 모두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마음입니다.
3. 십자가, 그 완전한 사랑의 절정
이러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우리는 이미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히브리어로 ‘호세아’와 ‘예슈아(예수)’는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호세아와 예수, 두 사람은 모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호세아는 비극적인 결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통해 그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오늘 어머니의 날, 우리는 어머니들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을 누리면서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고, 어머니 사랑을 당연하게 여겼던” 우리의 불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고, 때로는 그 사랑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우리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어머니의 사랑은 어떠했습니까? 그 사랑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솟아오를 정도로 깊고 뜨거운 사랑이었습니까? 이제 더 이상 그 사랑을 받을 수 없음에 안타까워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 위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여러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주신, 모든 것을 다 주고자 하시는,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주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미 만나신 분들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시고 그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3:18-19)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혹시,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괴롭습니까? 불행하게도 어머니로부터 진실된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어, 사랑에 목말라하며 살아오셨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지만, 어릴 때 차별받았던 상처로 인해 이제 더 이상 어머니에 대한 특별한 감정 없이 살아오셨습니까?
그렇다면 더욱더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 위에서 바로 여러분을 위해 물과 피를 다 쏟으신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참된 사랑, 영원한 사랑, 순도 100%의 사랑을 그곳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발견하는 순간, 자라면서 사랑받지 못해 생긴 내면의 결핍이 순식간에 채워지고도 남을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온전한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 또한 그 같은 사랑을 꿈꿀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권리 주장’을 외치다가 ‘희생 정신’을 잊어버렸습니다. ‘평등’을 구현하느라 ‘섬김’의 가치를 잃었습니다.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를 쫓느라 ‘자기희생’의 덕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유’를 추구하느라 ‘사랑의 구속’을 망각했습니다. 모두가 십자가를 내려놓고 자기 영광을 추구한 결과, 참된 사랑을 찾아보기 어려워졌습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질병이며, 우리가 앓고 있는 모든 질환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사랑을 회복하는 길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을 받아, 그 사랑 안에서 회복되고 치유되어, 마침내 그 사랑을 행할 수 있을 때까지 성장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여러분이 어부모님께 전화 한 통 더 하게 만들고, “감사합니다”는 따뜻한 말 한 마디 덧붙이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이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입니다. 그 사랑을 갈망하고 그 사랑을 얻기까지 십자가를 붙든다면, 누구에게나 이 사랑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 사랑이 복음입니다.
이 사랑이 구원입니다.
이 사랑이 능력입니다.
이 사랑이 영생입니다.
결론:
오늘 어버이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사합시다. 더 나아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하고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을 십자가 앞에서 깊이 경험합시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 또한 가정과 이웃에게 ‘그래도 되는 줄 아는’ 존재가 아니라, 기꺼이 사랑으로 섬기고 희생하는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까요?
첫째,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가족과 이웃에게 실천하십시오. 자녀나 부모, 배우자, 혹은 용서하기 어려운 친구에게 하나님의 오래 참는 사랑으로 대하십시오.
둘째,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듯, 나 자신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실패한 자신을 정죄하지 말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셋째, 사랑을 선택하는 작은 결단을 매일 하십시오. 분노 대신 인내를, 무관심 대신 관심을, 원망 대신 감사로 반응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줄’로 다른 이들을 이끄는 삶입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그 사랑을 세상 속에서 실천하는 제자가 되십시오. 그분은 여러분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날짜: 2025년 5월 11일
본문: 호세아 11:1-9
제목: 포기할 수 없는 사랑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어버이의 주일을 맞이하여 이 자리에 함께하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이 가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함께 나눌 이야기는 ‘포기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 주제를 묵상하면서 문득 예전에 소개하였던 한 편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서강대 영문과 교수였던 고(故) 장영희 씨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병상에서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소아마비로 불편한 몸이었던 딸을 위해 어머니 이길자 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매일 업고 학교를 오갔습니다. 눈 오는 날 새벽에는 연탄재를 뿌려 딸의 길을 만들었고, 수업 중에도 딸의 화장실 문제를 위해 교실을 드나들어야 했습니다. 장 교수는 어머니를 “운명처럼, 십자가처럼 나를 업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 한마디 역시 “엄마”였습니다. 장애라는 현실 앞에서 수많은 편견과 싸워야 했던 그녀에게 ‘엄마’는 두 다리였고, 오른팔이었으며, 삶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한 존재였습니다.
‘엄마’라는 단어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유대인의 속담처럼 ‘하나님이 모든 곳에 다 있을 수 없어서 대신 엄마를 만들었다’는 말은, 어머니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 웅변적으로 보여줍니다.
물론, 장 교수님의 어머니처럼 모든 어머니가 이상적인 모습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때로는 부족했고,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머니 역시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하고, 희생하고, 봉사했던 우리 어머니께 오히려 “미안하다”는 말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조차도 어머니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다가, 그 자리가 비었을 때 비로소 삶의 커다란 공백을 느끼고, 그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가족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뼈를 깎는 아픔과 고통일지라도, 무한한 인내로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시인 심순덕 씨의 시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과, 그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녀의 모습을 너무나도 잘 그려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도 한때는 부모에게 사랑 받는 딸이었고, 꿈 많던 소녀였으며, 사랑 받는 아내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머니를 처음부터 어머니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그 사랑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감사하다고 말한 게 언제입니까? 혹시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그래도 되는 줄 아는’존재가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바쁜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는 메시지 하나 보내는 것조차 어려워하고, 가족 단톡방의 메시지를 읽지 않은 채 넘어가기도 합니다.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를 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지만, 우리 어머니의 사랑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 사랑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붓기 전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알아주지 않는다고 야속해하지 않으시고, 이미 베푸신 사랑은 잊은 채, 앞으로 더 주어야 할 사랑만을 생각하시며 “더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내가 죄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십니다.
이런 어머니를 통해 진짜 사랑을 어느 정도 맛보신 분이라면, 자신이 특별한 축복을 받은 사람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는 분이라 할지라도 크게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찐한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그 사랑입니다.
1. 포기하지 않는 사랑
신구약성서 66권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메시지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결코 다함이 없는 사랑,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내어주고도 “더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 사랑,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이 당연시하고, 무시하고, 외면하고, 배반할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그 완벽한 사랑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많은 어머니들이 보여 준 사랑은 이 하나님 사랑의 모방품인 셈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구약성서의 호세아서입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호세아에게 차마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을 내리십니다. 평판이 좋지 않은 여인, 성매매를 하는 여인, 혹은 성 중독에 빠진 여인과 결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경건하게 살기를 원했던 호세아에게 부정한 결혼을 하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그러나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멜과 결혼하고 세 자녀를 낳습니다. 고멜은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듯했지만, 결국 과거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가출해 홍등가로 돌아갑니다.
호세아는 절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제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다시 한번 명령하십니다. 홍등가로 가서 그 여인을 다시 찾아오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은혜를 배반한 아내를 다시 데려와 사랑하라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지만 호세아는 순종합니다. 그는 적지 않은 몸값을 지불하고 부정한 아내를 다시 집으로 데려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어려운 명령을 호세아에게 반복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아무리 말해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파격적으로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랑을 얼마나 자주 당연시하고, 무시하고, 배반했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그 철없는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으셨는지를 호세아의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을 통해서 보여주려 하셨던 것입니다.
2. 붙붙는 사랑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호세아 11장 말씀은 마치 자녀를 향한 부모의 애끓는 사랑처럼, 끊임없이 배반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1절: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부터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갓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고 사랑하듯,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애굽의 속박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2절: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의 부르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이는 마치 자녀가 부모의 사랑과 기대를 저버리고 오히려 엇나가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3절: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찌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은 마치 어머니가 아이의 첫걸음을 돕듯, 이스라엘의 성장 과정을 친히 인도하시고 보호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또한 부모님의 희생과 헌신,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았습니까?
4절: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사랑의 줄’이라는 표현은 강압적인 힘이 아닌, 부드러운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멍에를 벗기시고 먹을 것을 주신 것은 그들에게 자유를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냅니다. 이는 어머니가 자녀를 희생적으로 돌보는 사랑과 닮아 있습니다.
5-7절: “저희가 애굽 땅으로 다시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찌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그로 인한 심판의 경고를 담고 있지만, 그 심판조차 하나님의 궁극적인 사랑의 계획 안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미워서가 아니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함인 것처럼, 하나님의 징계 또한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8-9절: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애끓는 심정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멸망한 도시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처럼 멸망하도록 이스라엘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라는 표현은 끊임없이 배반하는 백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고뇌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내적 갈등을 보여줍니다. 이어서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는 말씀은 그러한 갈등 속에서도 결국 진노를 압도적으로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변덕스럽고 조건적인 인간의 사랑과는 달리, 당신의 거룩하고 신실한 본성 때문에 결코 우리를 완전히 버릴 수 없다는 강력한 사랑의 선언입니다.
이 얼마나 눈물겨운 사랑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변덕, 우리의 배신,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삶을 모두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마음입니다.
3. 십자가, 그 완전한 사랑의 절정
이러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우리는 이미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히브리어로 ‘호세아’와 ‘예슈아(예수)’는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호세아와 예수, 두 사람은 모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호세아는 비극적인 결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통해 그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오늘 어머니의 날, 우리는 어머니들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을 누리면서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고, 어머니 사랑을 당연하게 여겼던” 우리의 불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고, 때로는 그 사랑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우리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어머니의 사랑은 어떠했습니까? 그 사랑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솟아오를 정도로 깊고 뜨거운 사랑이었습니까? 이제 더 이상 그 사랑을 받을 수 없음에 안타까워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 위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여러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주신, 모든 것을 다 주고자 하시는,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주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미 만나신 분들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시고 그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3:18-19)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혹시,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괴롭습니까? 불행하게도 어머니로부터 진실된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어, 사랑에 목말라하며 살아오셨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지만, 어릴 때 차별받았던 상처로 인해 이제 더 이상 어머니에 대한 특별한 감정 없이 살아오셨습니까?
그렇다면 더욱더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 위에서 바로 여러분을 위해 물과 피를 다 쏟으신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참된 사랑, 영원한 사랑, 순도 100%의 사랑을 그곳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발견하는 순간, 자라면서 사랑받지 못해 생긴 내면의 결핍이 순식간에 채워지고도 남을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온전한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 또한 그 같은 사랑을 꿈꿀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권리 주장’을 외치다가 ‘희생 정신’을 잊어버렸습니다. ‘평등’을 구현하느라 ‘섬김’의 가치를 잃었습니다.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를 쫓느라 ‘자기희생’의 덕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유’를 추구하느라 ‘사랑의 구속’을 망각했습니다. 모두가 십자가를 내려놓고 자기 영광을 추구한 결과, 참된 사랑을 찾아보기 어려워졌습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질병이며, 우리가 앓고 있는 모든 질환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사랑을 회복하는 길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을 받아, 그 사랑 안에서 회복되고 치유되어, 마침내 그 사랑을 행할 수 있을 때까지 성장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여러분이 어부모님께 전화 한 통 더 하게 만들고, “감사합니다”는 따뜻한 말 한 마디 덧붙이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이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입니다. 그 사랑을 갈망하고 그 사랑을 얻기까지 십자가를 붙든다면, 누구에게나 이 사랑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 사랑이 복음입니다.
이 사랑이 구원입니다.
이 사랑이 능력입니다.
이 사랑이 영생입니다.
결론:
오늘 어버이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사합시다. 더 나아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하고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을 십자가 앞에서 깊이 경험합시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 또한 가정과 이웃에게 ‘그래도 되는 줄 아는’ 존재가 아니라, 기꺼이 사랑으로 섬기고 희생하는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까요?
첫째,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가족과 이웃에게 실천하십시오. 자녀나 부모, 배우자, 혹은 용서하기 어려운 친구에게 하나님의 오래 참는 사랑으로 대하십시오.
둘째,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듯, 나 자신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실패한 자신을 정죄하지 말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셋째, 사랑을 선택하는 작은 결단을 매일 하십시오. 분노 대신 인내를, 무관심 대신 관심을, 원망 대신 감사로 반응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줄’로 다른 이들을 이끄는 삶입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그 사랑을 세상 속에서 실천하는 제자가 되십시오. 그분은 여러분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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